지역에서 본 세상

양계초는 리영희 선생께 우상일까 이성일까

김훤주 2011. 2. 2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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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량치차오 梁啓超 1874~1929)는 강유위(캉유웨이 康有爲 1858~1927)의 제자입니다. 나이 차이는 16살밖에 나지 않지만 둘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습니다.

이들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봉건제를 타파하고 개혁을 하는 데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한계는 당대에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그이들이 바탕삼았던 논리 가운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핵심으로 삼은 사회진화론도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들의 인종주의 관점도 잘못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백인종의 세계 지배 그리고 아시아 침략을 막기 위해 황인종끼리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황인종끼리 단결'은 바로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병탄과 중국 침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가 돼서 영미귀축(英米鬼畜-귀신이나 짐승 같은 영국과 미국)과 맞서는 성전(聖戰)을 벌였습니다.

강유위와 양계초가 이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침략당하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과 같은 '동양의 패자'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든 것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스승 강유위는 원세개(위안스카이)가 황제로 나아갔을 때 그 쪽에 붙어서 '공자의 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했고 제자 양계초는 원세개의 황제 등극을 반대한 차이는 있습니다. 봉건을 마주하는 자세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꼭 그까지입니다. 민주주의에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민주주의 자체를 믿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민을 주인으로 여기고 주인으로 삼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강유위와 양계초는 노신(루쉰)과 명백하게 다릅니다. 노신은 민의 고루함과 비루함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민의 각성과 주체화를 줄기차게 추구했습니다만, 강유위와 양계초는 민을 다스리는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입니다.

양계초는 아니지만 강유위에 대해서는 지난해 세상을 떠나신 리영희 선생도 한 마디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에 실은, '불효자의 변'이라는 글에 들어 있습니다.

'불효자의 변'에서 리영희 선생은 효도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기성 질서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 목적이 있겠지만 이미 달라진 시대 상황과 맞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강유위는 대선각자였지만 역사가 그의 한계를 넘어 전진하자 '원세개와 여원홍 대총통의 반동세력에게 아부하면서' '비극(차라리 희극)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스승 강유위와 제자 양계초가 리영희 선생이 평생 맞서 싸운 '우상'에 해당되는데도 리영희 선생을 양계초에 비기는 헌사가 있어서 좀 거슬렸습니다.(개인 취향일 수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1977년 11월 펴냈으나 곧바로 금서가 됐던 <우상과 이성>을 두고 10.26 박정희 피살 이후 5.18전두환쿠데타 이전 시기로 자유가 좀은 있던 1980년 3월 증보펀을 내면서 '우상'과 '이성'을 다시 거론했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허구와 반지성의 본질을 밝혀내고, 인위적으로 가려진 진실한 모습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우상과 이성>의 이름으로 한길사에 출판"됐다고 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면 양계초가 엄청난 진보였고 선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그이가 지녔던, 강자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를 저는 '허구와 반지성'=우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출판 당시에 짚으려 했으나 책을 펴낸 의도가 나쁘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리영희 선생을 양계초에 견준 것조차 리영희 선생을 대단한 인물로 돋보이게 하려는 취지였겠다고 보고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리영희 평전>입니다. 물론 어쩌면 관점의 차이이고, 그나마 차이는 조그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양계초의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을 보느냐 아니면 부정적이고 나쁜 측면을 보느냐 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여긴다는 얘기를 합니다. <리영희 평전>의 지은이는 리영희 선생에게 바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며 중국 5·4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양계초가 세상을 떴을 때 학자 여석산(閭錫山)이 썼다는 조문을 내놓습니다.

"著作等身(지은 글이 키만큼 높았으니),
 試問當代英年(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有幾多私淑弟子(사숙한 제자 얼마나 많은지),
燈淸攬(깨우치고 이끌어),
深慨同時群彦(동시대 영재들을 격동시켰으니),
更唯是繼起人才(뒤이을 인재 그 뉘인가)."


왜 하필이면 양계초에게 바쳐진 조문으로 리영희 선생을 추켜세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대에 영향을 크게 많이 끼쳤다 해도, 이미 한계가 뚜렷하게 나타난 사람의 것인데 말입니다.

차라리 노신에 대한 말이나 글을 갖고 그리했으면 훨씬 나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리영희 선생 스스로도 생전에 노신을 보고 배우고 따라 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으니까 말씀입니다. 

김훤주
리영희평전시대를밝힌사상의은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가
지은이 김삼웅 (책보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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