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소나무는 독야청청 아닌 생긴대로 사는 나무

김훤주 2010. 11. 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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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독야청청하다

사람들은 소나무를 두고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고들 합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잎을 지워도 소나무만큼은 저 홀로 푸르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절개를 꺾는 가운데서도 홀로 절개를 굳세게 지킴을 이르는 데에 더 많이 쓰입니다.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처럼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여기에는 조금 들어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는 홀로 있습니다. 아울러 특히 추운 겨울에 보면 매우 불쌍하지는 않고 적당히 가난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소나무가 별 욕심도 없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저 혼자 푸르게 산다고 여깁니다. 세월 풍파를 겪어서, 이리저리 휘이고 꺾이고는 했을지언정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나무를 더욱 높게 치는 것 같습니다.

솔숲.


소나무는 욕심 가득한 식물이다

과연 그럴까요? 독야청청할까요? 맨땅에서 시작된 숲의 한살이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맨땅은 오랜 옛날 빙하나 지각변동 때문에 새로 생긴 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산불이나 사람이 일부러 망가뜨려서 된 땅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맨땅에 처음 들어와 사는 식물을 선구(先驅) 수종이라 한답니다. 민들레 망초 개망초 질경이처럼 씨앗이 많고 또 멀리까지 퍼져가는 것들이죠. 민들레를 보면 솜털 같은 씨가 하염없이 날아가다가 떨어져서 싹이 트거든요.

맨땅은 영양분이 별로 없습니다. 땅 거죽에 유기질이 거의 없어서 다른 식물은 선구 수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선구 수종은 내리는 빗속의 질소와 이산화탄소를 주고받으면서 뿌리를 뻗습니다. 뿌리는 땅 속 영양분을 받아들여 몸체를 만들며 1년 뒤에는 죽게 됩니다.

한해살이풀인 선구 수종은 이렇게 선구자답게 '용감하게 빨아들여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이들이 몸을 바쳐 죽어 썩으면 거름이 됩니다. 민들레나 망초 질경이들은 비와 땅 속에 있는 영양분과 미네랄을 땅 거죽에 퍼뜨리는 노릇을 하는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다음에는 쑥대 같은 여러해살이풀이, 그 다음 단계에는 산딸기 같은 떨기나무(관목)가 자리잡은 뒤에야 큰키나무(교목)가 들어옵니다.

큰키나무 가운데서도 씨앗이 조그맣고 멀리까지 가면서 여러 군데로 흩어지는 나무가 먼저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소나무가 으뜸이고 이어서 버드나무 현사시나무 포플러 계통 나무들이 있습니다.

소나무의 씨앗은 아주 가볍기 때문에 아무 데나 쉽게 날아갑니다. 높은 기암절벽 바위틈에 소나무가 자라는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소나무가 메마른 땅에서만 자라는 줄 사람들은 아는데, 실은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기름진 땅에서는 더욱 잘 자란답니다.

이렇게 해서 이뤄지는 솔숲이 우거지게 됩니다. 이게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소나무가 자기 영토에 다른 나무나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욕심 또는 집착이 되겠습니다.

솔잎 화학물질에서 발아억제물질이 나와 다른 씨앗이 싹트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를 식물학자들은 전문용어로 타감(他感)작용이라 합니다. 솔숲 안 바닥에는 풀도 별로 없고 솔잎만 깔려 있는 까닭입니다.

솔숲 아래쪽 바닥에는 풀들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독야청청이라면서 높이 쳐주는 이런 소나무의 겉모습이, 실은 자기 영토에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려고 살균제를 뿌리는 등 독점하고 욕심을 부린 산물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나무는 말로(末路)까지 비참한 나무다

그러나 이렇게 욕심을 부리는 소나무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다음 나무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데 이렇게 생태계가 바뀌는 것을 천이(遷移)라 하지요.

소나무 다음에는 키도 크고 잎도 넓은 것들, 졸참 신갈 굴참 갈참 떡갈 상수리나무 같은 참나무 등속이 들어섭니다. 참나무 등속은 열매가 무겁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들 나무가 널리 흩어져서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들 나무는 열매가 무거운 때문에 아래쪽으로 쏠립니다. 낙엽 같은 영양물질도 굴러내리거나 비에 씻겨 밑으로 내려갑니다. 마루는 메말라지고 골짜기는 기름지게 됩니다.

그래서 참나무들은 골짜기 같은 아래쪽에 자리잡고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참나무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잎이 넓기 때문에 소나무와는 경쟁이 안 됩니다.

그늘진 데서도 잘 자라고 나아가 자랄수록 더 햇볕을 '선점'하기에 소나무의 '퇴각'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산을 바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는 자꾸 위쪽으로 몰립니다. 그래서 소나무는 높은 데서 잘 자라고 참나무 따위들은 아래쪽에서 잘 자란다지만 이는 껍데기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아래에도 소나무가 살고 있지만 이것들은 참나무와 경쟁에서 패배해 전사할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입니다. 기름진 골짜기는 빼앗기고 메마른 산마루로 자꾸자꾸 쫓기는 형상입지요.

위 사진은 그래도 숲이 좀 젊은 산이고요, 아래 사진은 천이가 많이 진행된, 숲이 좀 늙은 산입니다.


그러다 산꼭대기 가까운 팍팍한 바위 틈새에서나 겨우
남루하게 자리 보전을 하는 것입니다.

<<참나무도 물론 이런 위세를 오래 부리지는 못합니니다. 남부 지역에서는 늘푸른 잎넓은 나무(후박나무나 육박나무)가, 중부 지역이나 고산지대에서는 잎이 지기는 하지만 더욱 큰키나무(서어나무나 까치박달나무)가 참나무를 결국은 이겨 먹습니다. 극상(極上)이지요.>>

그러니까 결론 삼아 말하자면 소나무는 독야청청하는 고상한 나무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영토를 풀에게조차 내어주지 않으려고 독성물질을 뿌려대는 욕심많고 집착이 센 고약한 나무입니다.

그러면서도 참나무 따위를 이겨내지 못해 영양분 많은 골짜기는 내어주고 메마른 산마루로 패퇴를 거듭하는 비참한 나무입니다.

소나무는 자기 생긴 모습대로 살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 현상이 아닐까요?

소나무는 원래 자기 생겨 먹은대로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불리고 키를 키우고 그렇게 사는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독야청청도 없고 욕심도 없고 집착도 없고 경쟁도 없고 패퇴도 없고 승리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자기 생각의 작용으로 소나무의 어떤 한 모습만 보고 거기에 매여 이름을 붙인 것일 따름입니다.

소나무는 어느 한 순간도 자기가 독야청청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자기가 욕심 많은 집착 덩어리라는 소리나 생각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레짐작으로 그리 여길 뿐입니다. 실체와는 전혀 무관합지요.

소나무 원래 생긴 모습이 그렇고 소나무 원래 만들어진 천성이 그럴 뿐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소나무를 한 번 직시(直視)해 보시지요.

그렇게 해서 한 200년 살다가 메말라 죽으면 그만인 소나무의 한살이입니다. 태어나 살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 다른 나무나 풀들 사는 데 거름으로 썩는 것입니다.

사람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착하다거나 악하다거나,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것도 사람이 지은 구분일 뿐입니다. 거기에 매여 착하게 보이거나 졸게 보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삶이 고달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그냥 자기 생긴 모습과 천성대로 그냥 살다가 그냥 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요?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지난 주말 가을철 단풍 구경을 하려고 산에 들어갔다가, 화려찬란한 단풍을 옆에 두고 푸르죽죽 조용하게 서 있는 소나무들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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