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마산 한일합섬 터엔 이런 기념물조차 없다

김훤주 2010. 10.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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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만명 넘었던 한일합섬은 자취도 없지만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는 한 때 마산을 대표하는 기업이었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마산과 한일합섬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한일합섬의 쇠락이 마산의 쇠락을 결정하는 그런 구실까지 했다는 측면에서요.

한일합섬이 망하게 됐을 때 지역에서는 한일합섬을 살리자는 운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일합섬 자본은 그런 가운데서도 공장터를 팔아먹고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김인규 당시 마산시장한테 뇌물을 썼습니다. 5000만원을 받았다고 사실로 인정돼 김 시장은 감옥살이를 톡톡하게 했습니다. 2001년 3월 13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추징금 5000만원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공장터의 용도변경은 당연히 자본한테 유리하게 했습니다. 1998년, 공장용지는 자본에게 아무 부담도 지우지 않고 주거용지와 상업용지로 바뀌었습니다.


뇌물 쓴 대가겠지요. 보통 이런 대규모 개발을 하면 엄청난 이익이 남게 마련이고 그에 대한 공공 환수 차원에서 공공 용지를 내놓는데, 한일합섬은 그런 것을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거 전 한일합섬 공장 건물. 경남도민일보 사진.


서익진 경남대 경제학 교수는 자기가 펴낸 책 <마산, 길을 찾다>에서 마산이 되살아나는 길은 바로 문화도시로 거듭 나는 데 있다면서 섬유박물관 얘기를 꺼냈습니다.


한일합섬이 한 때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는 상징성을 잘 살려, 공장터를 주거지나 상업지로 재개발하면서도 그 일부를 공공용지로 조성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마산에는 한일합섬 말고도 마산방직이라든지 경남모직(지금도 있습니다) 같은 섬유 관련 공장들이 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이 가동을 하고 있었으니 섬유박물관이 무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1200명 규모였던 심도물산은 기념물이 있고

9월 24일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만나러 서울에 갔다가 이튿날 강화도에 잠깐 놀러 갔는데, 거기서 저는 재미있는 것을 눈에 담았습니다.


1900년 세워져 역사가 오래 됐고 또 전통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라 2001년 국가유적으로 지정되는 등 눈길을 안팎에서 끌고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 바로 아래에 있는 조그만 공원에서였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공장 굴뚝 같은 것이 솟아 있었습니다. 공장 굴뚝이라 하기에는 아주 낮았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아랫부분이 잘려져 나가고 남은 굴뚝 윗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여기 이렇게 기념을 하고 있는 심도물산과 그 창업주 김재소는 여기 적힌 것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역 경제에 좋은 영향만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지요.


1967년 노조 결성을 시도하는 노동자 2명을 해고하는 등 노동운동을 가로막고 꺾었으며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하기도 했으니까 지역 사회에 이런저런 폐해를 전혀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한일합섬 관련 기억과 추억은 엄청 많을 텐데

이런저런 얘기를 떠나,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한일합섬 터에는, 지금 메트로시티 아파트 단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인데, 당연히 이런 조그만 상징물 기념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데에 제 아쉬움이 쏠렸습니다.

창원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한일합섬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한 때 2만 명이 넘어 단일 공장으로는 아시아에서 으뜸이었으며, 이른바 여공(女工)이 절대 다수였고 이들이 오래 일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위에서 1966년 들어섰다가 1998년 부도를 맞고 1999년 회사 정리에 들어간 다음 2007년 동양그룹에 넘어갔음을 생각하면, 적어도 32년 동안 왕성하게 공장이 돌아갔으니 여기를 거쳐간 사람들이 그야말로 엄청날 것입니다.

그이들의 한일합섬이나 마산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도 많을 것입니다. 1986년부터 마산·창원에서 살게 된 저 같은 얼뜨기조차 한일합섬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가 적지 않으니까 몸소 겪은 그이들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철거가 끝난 한일합섬 공장터. 경남도민일보 사진.


참고 삼으시라고, 제가 듣거나 봐서 알고 있는 얘기를 몇몇 끼적여 보겠습니다.

부림시장 먹자골목은 한일합섬 여자애들이 먹여 살렸다.

한일합섬과 한일여실을 잇는 일대에는 오뎅 떡볶이 따위를 파는 분식점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지금은 마산한일여자전산고등학교)에는 거기 다니는 여자아이들이 자기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섞어 만든 팔도 운동장이 있다.

주·야 3교대 근무가 무척 힘들었고 기숙사는 거의 닭장 수준이었다.

관리자는 대부분 남자였는데 성폭행 성추행이 적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 말 가운데 '한일 딸아들은 먹어 조지고 수출 딸아들은 입어 조진다'가 있었다. 한일합섬 딸애들은 먹는 데 많이 쓰고 마산수출자유지역 딸애들은 입는 데 많이 쓴다는 얘기다.

한일여실은 값싸고 어린 여성 노동력을 확보하는 주요한 지렛대였다. 60년대와 70년대 기껏해야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한일합섬으로 빨아들이는 빨대가 한일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일여실 딸아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졸면서' 3년 동안 버티어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되면 대부분이 미련없이 한일합섬을 때려치웠다.

한일여실을 졸업하고 한일합섬을 때려치운 딸아들은 마산수출자유지역 취직을 다음 단계로 삼았다. 한일합섬보다 일도 덜 힘들고 임금도 덜 적었고 구박도 덜 받았다. 등등등…….

4. 근대 마산의 중요한 역사가 지워졌다

신도물산과 같이 공장 굴뚝이라도 지금 조금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이들을 위한 기념물 하나 남지 않았고 그이들이 몸 바쳐 일한 공장을 기억하는 상징물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한일합섬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메트로시티. 경남도민일보 사진.


메트로시티 아파트를 짓기 위한 철거 작업이 끝나면서, 한일합섬과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은 깡그리 없어졌을 것입니다.

지금 또는 여태껏 이 도시를 주물럭거려 온 사람들이 이런 데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현실이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이들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근대 마산에서 가장 커다란 역사를 자취도 없이 지워버리고 나아가 사람들 추억과 기억조차 소리없이 제거한 인간들입니다. 그것도 사리사욕을 위해서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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