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그 자리에 진보 노동운동가는 없었다

기록하는 사람 2010. 10. 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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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운동의 선구자 고(故) 소담(昭潭) 노현섭 선생 추모회'라는 긴 제목의 모임이 2일 오후 6시 마산M호텔에서 열렸다. 노현섭(1921~1991) 선생이 타계한 지 20년, 누명을 쓰고 투옥된 지 50년만에 처음 열린 지역사회 차원의 추모행사였다.

묻혀진 노동운동의 선구자 추모행사

참석자들의 면면을 기록삼아 적어 보면 이렇다. 김재윤 전 경남대 교수, 이순항 전 경남도민일보 대표이사, 홍중조 전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 황창규 전 항운노조 위원장, 김명호 경남항운노조 위원장과 간부들, 최광주 경상남도 새마을회 회장, 백한기 3·15의거기념사업회장, 김종배 전 3·15의거기념사업회장, 조민규 합포문화동인회 이사장, 김종대 창원시의회 의원, 허진수 전 경남도의원,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 권광정 씨, 서익수 마산 무학여중고 재단이사장, 정성기 부마항쟁기념사업회장과 회원, 이광석 전 경남신문 주필, 박성관 전 경남신문 대표이사, 김동구 변호사, 경남에너지 전직 임원진들, 술우회 회원들, 허청륭 서양화가, 경남대 유형창·윤진기·고평석 교수….

물론 노현섭 선생의 후손들도 참석했고, 필자 또한 거기에 있었다. 사회는 이상용 극단 마산 대표가 맡았다. 모두 어림잡아 90여 명 정도였다.


이만한 분들에게 존경받는 분이라면 노현섭 선생은 필시 대단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런 분에 대한 추모행사가 사후 20년이 다 되도록 왜 이렇게 늦게 열린 것일까? 그건 바로 노현섭 선생이 덮어쓴 누명이 '용공(容共)', 즉 '빨갱이 딱지'였기 때문이다. 노 선생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1961년 12월 7일 쿠데타정권의 혁명재판소 판결문의 일부를 보자.

"이상 종합하여 심안하니 북한괴뢰의 동조자였던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 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중략)… 북한괴뢰가 간접침략의 한 방안으로서 기대하는 그들의 동조자의 확대 및 조직강화 그 사상선전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중략)… 판시사실은 그 증명이 충분하다."

정작 계승해야 할 세대는 무관심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있을 당시의 노현섭 선생.

노현섭 선생은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마산자유연맹 위원장과 전국자유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고등공민학교와 노동병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했던 마산노동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6·25 때 친형인 노상도 씨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후, 1960년 3·15의거로 학살책임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뛰어들어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를 결성한 데 이어 전국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바로 이 때문에 평생 '빨갱이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었다.

레드컴플렉스가 심한 한국사회에서 이 딱지는 곧 '접근금지 인물'을 의미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거나 그를 따르는 인물 역시 빨갱이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누명이 올해 들어 법원의 재심으로 벗겨졌고, 이제야 추모행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자리에 이른바 '진보 노동운동가'라는 분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좀 더 빨리 노현섭이라는 인물을 재조명하기엔 그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늙었고, 마땅히 그를 계승해야 할 '진보 노동운동가'들은 지역의 역사에 너무 무지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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