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5월, 광주, 그리고 내 인생

김훤주 2008. 5. 1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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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찾은 광주 망월동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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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민주묘지 홈페이지서 내려받은 추모관 모습.

2008년 5월 8일,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았습니다. 광주 항쟁이 일어난 지 28년만에, 그리고 제가 이 광주를 알게 된 지 26년만에 참배한 광주 묘역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많은 이들을 보내기는 했으면서도 한 번도 찾지 못했던 망월동이었습니다.

정식 이름은 국립5.18민주묘지로 돼 있더군요.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모인 본디 목적인 언론노조 산별 교섭 쟁취를 위한 수련회 일정이 목을 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향과 헌화를 하고 누워 있는 몇 분 무덤만을 둘러봤습니다.

기록상 가장 먼저 숨을 거둔 김경철,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자였답니다. 문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숨진 최미애, 당시 배속에는 8개월 태아가 있었답니다. 군인들 총알에 죽은 박금희, 다친 사람 치료하는 데 써라고 헌혈을 하고 나오다 그리 됐답니다.

결국 흘러내리고 만 눈물

일행과 함께 묘역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삐질삐질 흘러나왔습니다. 삶과 죽음이 구체(具體)로 다가왔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지금 우리 일상과 매한가지로, 누더기처럼 꼬질꼬질하면서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끼고 즐거워하고 잘못하고 괴로워하고 꿈을 품고 뒹굴었던 그런 삶이 죽음이 돼서 여기 누워 있다는 느낌입니다.

코를 몇 차례 훌쩍거리다가 결국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광주 5.18 묘역을 찾지 않은 까닭은 아마 ‘부채의식’인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빚을 얻고 제대로 갚지 못한 사람이 빚 준 이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제게 있었습니다.

제가 지독하게 부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전라도닷컴> 2001년 6월호에 실으려고 제가 쓴 글입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5월, 광주, 그리고 내 인생’. 제 삶의 많은 부분이 5월 광주에 기대어 있다는 자백이었습니다.

'5월, 광주, 그리고 내 인생'

제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장차 시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가 운동을 하게 된 것은,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전두환의 광주학살 때문입니다.

80년 5월, 저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장군’ 전두환의 집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배경도 몰랐고 피냄새도 맡지 못했습니다. ‘5월 광주’는 철저한 통제 대상이었지요. 82년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모른 채 지냈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강의실이나 운동장, 잔디밭 따위에 학생 서넛만 일없이 모여 있어도 사복 경찰이 붙었습니다. 아침이면 전경 3개 중대가 학교 운동장에 줄지어서 ‘조회’를 했습니다. 조회를 마친 다음 학내 곳곳으로 흩어져 학생들을 감시했습니다.

데모를 계획했어도 정보가 새어 나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학우여!”의 “학!”밖에 외치지 못하고 개처럼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데모를 하려면 미리 점찍어둔 장소에서 주동-우리는 ‘야사’(야전사령관)라고 했습니다-이 기습하듯이 “학우여!” 하고 외치며 뛰쳐나와야 했습니다. 지침을 받고 주위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가세하면 데모가 시작되는데, 현장에 학생증이 떨어져 있었다는 까닭만으로 군대에 끌려간 선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모할 때는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말라는 지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광주 학살 사진들은 충격이었습니다. 사실은 선배들이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보여준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하나같이 처참했습니다. 떼지어 있는 주검들, 턱 아래와 위가 따로 떨어져 나간 얼굴, 칼로 도려낸 가슴, 숨진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아이, 주검을 수레에 싣고 슬피 부르짖는 사람들……. ‘도대체 왜?’ 하는 생각이 들었고, ‘2000명을 죽인 학살자’와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때가 2학년 2학기, 83년 9월이었으니 늦깎이로 운동에 뛰어든 셈이지요.

학과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데모와 사회과학 공부에 열을 올렸습니다. ‘가투’(거리투쟁)와 ‘피세일’(비밀전단 뿌리기),‘쎄미나’(공부),‘조직’(후배 끌어들이기)으로 해가 뜨고 달이 졌습니다. 인식의 폭은 개인에서 사회와 세계·우주까지 나름대로 넓어졌습니다. 존재와 삶에 대한 접근도 심각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곧 혁명운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학교를 마치고 공장에 가 노동운동을 해야만 올바른 운동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민과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 줬습니다. 85년 5월, 서울 다섯 개 학교의 투쟁조직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미문화원 점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학교의 선전조직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막 만든 기관지를 배포하려고 뛰어다닐 때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미문점농’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더욱 거세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어느 날, 야밤을 틈타 비밀스럽게 학교에 경찰을 풀어 학회와 써클(요즘은 동아리라 하지요)들에 있던 것을 모두 털었습니다. 화염병과 여러 선전물 따위는 물론이고, 교과서를 비롯한 책과 공책까지 실어냈으며, 남아 있던 학생들까지 잡아갔습니다. 1년 전 학원 자율화 조치가 있었던지라, 당시는 학내가 오히려 안전하다고 여겼었는데, 무슨 군사 작전이나 하듯 허를 찔렀던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2000부를 찍은 기관지 <일보전진>은 거의 모두 압수됐습니다. 3년여 동안 없는 용돈을 아껴 고르고 골라 사 모은 책 200여 권도 없어졌습니다. 중3 때부터 틈틈이 써 왔던 습작 시들도 모조리 털렸습니다. 너무 슬프고 원망스러웠으며 존재 자체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기울인 노력의 결과가 한 순간에 모조리 없어지고 나니 진짜 절망스러웠습니다.

몇 날 며칠을 술 마시며 괴로워하다 결심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째 유치하다는 느낌도 듭니다만, 그때는 진짜 비감했습니다. “파쇼 아래서는 시도 쓸 수 없으니 시 쓸 자유를 위해서라도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파쇼를 끝장내기 전에는 시를 쓰지 않겠다.”

저는 이렇게 해서 문학과 시인의 꿈을 접었습니다. 곧이어 7월에 전두환이 이적표현물을 만들어 뿌렸다는 죄목으로 저를 구속하는 바람에 더욱 굳었습니다. 여섯 달 동안 서대문 구치소의 삼사하(三舍下) 27방-25방에는 지금 전남도의원이 돼 있는 신정훈이 징역을 살고 있었습니다-에 있으면서, 300권 가까이 책을 읽어 모자라는 공부를 채우고 인식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풀려나서 학교를 마치자마자 저는 마산·창원에 와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참 힘들었지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진보정당운동도 하게 됐고 이제는 ‘작지만 바른 신문’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경남도민일보의 평기자이자 노조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적어도 원고가 함부로 털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를 자유롭게 써 모을 자유는 쟁취한 셈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유는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제는 안타깝게도 손이 굳어 잘 되지 않습니다.

21세기 들어 처음 맞이한 광주의 5월을 지나면서, 제 마음속에 녹아 있는 ‘5월 광주’와 함께, 저의 지난 삶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부채의식이 사라졌다!-당신은 당신, 나는 나

물론 지금은 제게 부채의식이 없습니다. 지금은 ‘80년 5월 광주’는 당신들의 삶이고 죽음이고 역사이고 운명이다, 이렇게 여깁니다. 지금은 나의 삶과 죽음과 역사와 운명은 ‘80년 5월 광주’에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여깁니다.

이제 철이 좀 들었나 봅니다. 철이 들다 보니 옆집 사람들 고통을 받고 생명을 꺾은 죽음 앞으로 걸어 갈 용기가 났나 봅니다. 저는 이제 그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머리에만 의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신들 몫을 대신 살아주겠다는 생각은 아마 욕심이었지 싶습니다.

이번에 저는, 당신들은 당신들 몫을 살고 당신들 몫을 죽었습니다,고 5월 광주 영령들께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나와 우리를 위해 운동합니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당신들과 당신들 고통은 잊지 않겠으며 또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는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리 다짐했습니다.

저는 이제 광주에서 해방됐습니다. 저는 더 이상 광주에서 존재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 이유가 제 스스로에게 있음을 뒤늦게나마 눈치 챘습니다. 이로써, 조금밖에 안 되지만, 개미 발자국 한 걸음만큼만이라도 더, 자유(自由-스스로 말미암음)에 가까워졌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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