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경남 마산과 충남 조치원이 이토록 같다니

김훤주 2010. 6. 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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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을 읽다가 눈물이 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하는 말을 끌어 쓴 대목에서다. 이게 실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얼마나 눈물겨운 말인지, 얼마나 하고 싶지 않은 말인지,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도대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이런 것밖에 없다는 참담함……. 그러나 사실 대부분 인생은 이런 길밖에 없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이런 꼴을 당하면 어떨까. 강수돌은 그런 일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마산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바로 황철곤 마산시장과 STX조선 그룹이 작당하고 벌이는 '수정만 매립지 STX 조선기자재 공장 진입'이다.

황철곤 시장은 2008년 공장 진입을 두고 찬반으로 갈려 있는 주민들에게 찬반 투표를 시키고 절반도 찬성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 찬성률이 나왔다 선언하고 밀어부쳤다.

이런 과정에서 회유와 매수와 협박과 사기와 기만이 광범하게 이뤄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마을 공동체는 산산조각이 났다.

조선기자재 공장 예정터는 중학교랑 바로 붙어 있고 지형은 소음과 먼지가 빠져나갈 수 없는 꼴이었으며 조선기자재 공장은 좁은 2차선 도로 말고는 마을과 얼굴을 마주대고 있는 꼴이다.

마을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경인데도 이토록 행정은 난폭했다. 나아가 행정의 조작과 일반 사람들의 무심함으로 말미암아, STX 조선기자재 공장 진입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마산 경제를 죽이는 '역적'으로 몰렸다. 

마산의 뜻있는 이들은 세상에 이런 무지막지한 일이 더는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이런 데가 또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 더 심한지도 모르겠다.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가 바로 그 곳이다.

"사업은 대략 3000억원 규모다. 남으로 고려대, 북으로 홍익대 캠퍼스를 끼고 있는 대학촌 예정지에다가 비밀리에 아파트라니, 말도 안 된다. 이럴 수가! 치가 떨렸다.

수천, 수만 년을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온 바로 그 터전, 그 논과 밭, 과수원과 구릉지를 하루아침에 허물고 되물리기 어려운 시멘트 흉물 덩어리를 세운다니,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대학 교수라기보다 마을 주민으로서 이 싸움에 온몸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에 살건, 내가 아끼는 마을과 자연이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을 마냥 눈뜨고 볼 수 없었기에, 마을과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자는 것,

이것이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어쩌면 이 싸움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끝날지 잘 몰랐기에 더 용감히 뛰어든 건지도 모른다."

"마치 인생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듯, 이 싸움도 나 스스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만들어야 했다.

누가 대신해줄 일이 아니었다. 남을 위해 대신해준다고 생각하는 한, 싸움의 동력은 금방 사그라진다. 인생의 길처럼 나 스스로 걸어가며 느끼고 깨치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며 없던 길도 새로 열어나가야 했다."

2007년 7월 12일 당시 이장이던 강수돌 교수가 전 이장에게 폭행당해 왼쪽 눈알이 뽑힐 뻔했다. 주간 세종뉴스 사진.


"도지사는 동석한 부지사 및 담당 공무원을 보고 '이거 원래 연기군이 대학촌을 만든다고 하던 곳이고 충남도에서도 대학로 순환도로 공사를 한다고 수억 원을 지원한 곳이니 아파트 사업은 안 된다고 연기군에 아예 공문을 내려보내세요 알았지요?'라고 통쾌하게 말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거듭하고 우리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도지사실일 빠져 나왔다. 도청 기자실에도 들러 그런 경과를 이야기해주고는 널리 보도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이상하게도 분위기는 좀 썰렁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더 속았다. 공무원들이 하나도 움직이기 않았기 때문이다. 되레 연기군은 착실히 협의를 거쳐 아파트 사업을 위한 서류를 만들고 있었고, 충남도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엉터리 교통영향평가 보고서 사본을 들고 충남도청 건설교통국장으로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가 '국장님, 도대체 1000세대 아파트 단지에 입주 완료하고 승용차가 1년에 단 1대씩 증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 따지자, 당황한 그는 '이거 오타네요, 오타'라고 답했다.

그 어려운 행정고시를 쳐서 고급 공무원이 된 사람이 전문가 회의에 참여했으면서도 그 회의에서 가결된 내용을 사후에 '오타'라고 하다니……. "

"엉터리 교통영향평가 보고서를 들고 전국의 교통문제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대부분의 전문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간 자기 이름이 더 이상 업계에서 영구 추방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전문가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무서운 현실이고 다른 편으론 웃기는 현실이다. 차라리 전문가라는 이름이나 쓰지 말 일이지."

"결산하면, 우리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다. 아파트 사업 자체는 막지 못했지만, 아파트 단지 건설 과정이 중단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1000세대 가까운 고층 아파트 12개 동의 골조는 병풍처럼 빼곡하게 들어섰지만 분양률이 2%에도 못 미쳐 창문이나 인테리어도 못 한 채 철수한 것이다. 사업이나 경영의 기본이라 할, 수요 예측과 타당성 검토에 철저히 실패한 까닭이다. 5년 전에 진지하게 경고한 바를 무시한 결과다."

"터무니 없는 개발 사업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고 싶다면 우리 마을로 오시라. 기업이 지역 여건이나 마을 주민을 무시하고 일확천금에 눈이 멀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면 우리 마을에 연중 무휴 24시간 전시된 유령 아파트 단지를 보러 오시라."

5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하나가 돼 애쓴 결과는 그러나 흉물스럽게 남은 짓다 만 아파트만은 아니었다. '생동하는 마을 공화국'도 하나 남았다.

5월 11일 제2회 신안리 골목축제에서 조치원읍 신안 1리 마을 주민과 대학생이 흥겹게 춤추는 모습. 주산 세종뉴스 사진.


공동체문화라 할 수 있는 골목축제가 자율적으로 열리고 아이들 글쓰기 교실이 열리고 마을도서관까지 만들어졌다. 활기가 생기가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지금은 아주 잘 팔리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이 전혀 팔리지 않는 때가 아주 서둘러 오기도 함께 바란다. 지금 잘 팔리기를 바라는 것보다 100배 1000배도 더 절실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란다. 

끄트머리에는 '잘못된 개발 사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풀뿌리 운동 메뉴얼'이 붙어 있다. 5년 투쟁의 교훈이랄 수 있겠다. 강수돌은 고려대 세종캠퍼스 교수로 있던 2005년 6월 신안1리 이장으로 선출돼 지금껏 이장 노릇을 하고 있다.

(투쟁 과정에서 이장이 대학교수라서 득을 본 면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거나 본질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고 그것이 마을 주민들의 운동을 깎아내릴 사유는 못 된다고 본다.)

김훤주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 10점
강수돌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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