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우리말 동네 이름 내쫓은 새마을운동

김훤주 2008. 5. 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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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살던 동네 창녕 신기동

제가 어릴 적 살던 창녕군 창녕읍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에 다시 창녕 들어가 살던 동네는 신기동입니다. 태어난 데는 신기동 아래 창녕 성당 아래에 있는 송현동입니다. 태어난 뒤에는 곧바로 고향인 유어면 대대리에 가서 살다가, 함양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태어나신 동네인 대대에는 6.25 때 망가져 새로 지은 할아버지 집이 있습니다. 대대 앞에는 뻘밭(요즘으로 치면 습지라 일렀겠지요)을 개간한 너른 들판이 있고, 건너편에는 관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송현동은 군청과 경찰서 바로 왼쪽 옆에 있었고요 군청과 경찰서의 오른편 위쪽(그러니까 동남쪽) 동네가 바로 신기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청 아래쪽 장터에서 군청까지 이르는 길은 중앙통이라고들 일렀습니다.

새마을운동 이후 우리말 이름 사라졌다

우리 어릴 때는 송현(松峴)동을 솔터라 했습니다. 신기(新基)동은 새터였으며 대대(大垈)는 한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우리도 어른들 쓰는 말을 따라 하다 보니 순우리말을 그대로 썼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중국글말이 자리를 굳혔습니다.

어떻게 굳혔느냐 하면, 동네 들머리마다 동네 이름을 알리는 빗돌을 하나씩 세웠는데, 여기다 모조리 중국글말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이 때문에 토종 순우리말 이름이 더욱 손쉽게 사라지고 말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중국글말로 된 땅이름은 이를테면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관공서 따위에서는 땅이름을 중국글로 적었습니다. 보기를 들겠습니다. 지금 전국에 유명한 창녕 우포늪은 우리말로 '소벌'이라 합니다. 이것의 중국글 이름은 두 개 있는데, 뜻을 딴 이름은 알려진대로 우포이며, 소리를 딴 이름은 소맥(小麥=소+보리의 보ㄹ)입니다.
우리말 이름이 한 번 더 괴로움을 겪는 때는 바로 일제 강점 시절인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 정비를 할 때입니다. 이 때는 우리말은 뜻이나 소리를 따라 중국글로 바뀌는 수준을 넘어서서, 커다란 왜곡을 당하기도 합니다. 보기를 들겠습니다.
전북 정읍에 이평(梨坪)면이 있습니다. 일대 평야를 이평평야라고 합니다. 일제 이전에는 배들이었습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동진강을 따라서, 여기까지 배가 들어왔다 해서 된 배들입니다. 이 배들을 일제 때 바꾼 이름이 바로 이평입니다. 이렇게 해서 '배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배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쳇말로 일제는 이 이평으로 배들을 두 번 죽인 셈입니다.
(밑줄 친 글은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 지적을 받아들여 더한 부분입니다. 이 말이 없다보니 마치 새마을운동 때 정권이 정책적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오해할 여지를 남겼다는 얘기였습니다. 꼬집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런데 관동(冠洞)은 그대로 관동이라 했는데, 근처에 갓골이라는 데가 하나 더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커서 들으니 중심지에서 떨어져 가장자리 동네를 관동이라 한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로 '갓골'이라 했겠는데 중국글로 적다보니 가장자리를 뜻하는 갓과 머리에 쓰는 갓이 소리가 비슷하다고 갓 관(冠)자를 빌려쓴 셈이지요.

전국에 신기동(리)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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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지도에 빠져 논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서해 바닷가에서 마산이라는 땅이름을 찾아내곤 경남 마산이랑 같다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제 고향 마을 이름을 갖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번 해 봤습니다. 물론, 옛날 같은 신기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관동(=갓골)은 한 번 찾아보니 경남 김해시 장유면과 경북 상주시 외서면과 인천시 중구와 전남 장성군 황룡면과 전남 장흥군 유치면 전남 해남군 해남읍과 전남 해남군 화산면과 충남 논산시 연산면과, 에 있었습니다.

대대(=한터)는 이보다 적었습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과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과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과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과 전남 순천시와 충북 단양군 가곡면에 있었습니다. 행정 동/리로 찾았으니까, 여기서 확인되지 않는 자연 마을 이름까지 치면 더 많을 것입니다.

신기(=새터)로 검색해 봤더니 희한하게도 강원도 삼척시에서 면(面)이 하나 찾아졌습니다. 신기면인데, 면 소재지가 있는 동네가 또 신기리더군요. 백과사전에는 70년 설치된 도계읍 신기출장소가 89년 신기면으로 승격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제 20년밖에 안 되는 새 터인 셈입니다.

새터는 이처럼 많았습니다. 경기도 안성시에는 미양면과 서운면에 신기리가 하나씩 있고 경남에서는 마산시 진동면과 산청군 차황면과 하동군 하동읍과 진주시 명석면에 신기리, 양산시에는 신기동이 있습니다.

경북에도 구미시 선산읍 영덕군 창수면과 청송군 파천면에 신기리, 문경시와 영천시에 신기동이 있습니다. 대구에는 신기리와 신기동이 달성군 현풍면과 동구에도 하나씩 있습니다.

전남에도 새터는 12개나 있고 전북과 충남과 충북에서도 제각각 6개와 3개와 7개가 찾겼습니다. 덧붙이자면,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신설(新設)동도 신기동이랑 같은 이름입니다. 새로 베풀어 만들었다는 말인데, 대신 역사는 가장 오래 됐을 것입니다. 일제 이전부터 그랬다니까요.

송현(=솔터 또는 솔티<고개>)도 꽤 됩니다. 저도 처음 알았는데, 서울 한복판 종로에도 있고 인천과 대구와 울산에도 하나씩 있습니다. 전남에 넷이고 강원도가 셋, 경기도와 경남과 전북이 둘씩이고 경북과 충남과 충북은 하나씩 있습니다.

중앙동은 왜 중앙동이지?

마지막으로 중앙동. 중앙동은 보통 고을에서 으뜸가는 관공서가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있는 마산도 시청이 중앙동3가에 있습니다. 대충 보니까 강원도 속초도 시청이 중앙동에 있고 경기도 과천은 시청뿐 아니라 정부종합청사까지 중앙동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중앙동이라 해도 해당 시나 군의 한가운데 있지는 않습니다. 원래는 한가운데 있었겠지만 시나 군이 영역을 어느 쪽으로 넓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마산은 시내 개념으로 보면 중앙동이 서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산 중앙동도 한가운데가 아닙니다. 조금 남서쪽이지요. 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혔지만, 북동쪽으로 더 많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부산은 시청을 아예 옮겼습니다. 연제구 연산동으로 말입니다. 새로 쓰는 주소는 '연제구 중앙로 2001(연산동)', 이리 돼 있습니다.  시청 일대를 중앙통이라 하는 잔재는 여기서도 그대로 확인되는군요.

지금이라도 순우리말 이름을 되살리면

어쨌거나 저는 한글 이름이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중국글을 걷어내고 우리 한글로 마을 이름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뜻도 쉬 통합니다. 중국글은 뜻글자지만 우리 말글 체계로는 소리만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중국글을 모르면 도통 알기 어렵게 돼 버립니다.

제 고향 한터에 닿아 있는 소벌-그 이름난 창녕 우포(牛浦)-을 건너가면 ‘소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것을 중국글 목덜미 항(項)을 써서 ‘우항(牛項)’이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습지에서 시 쓰는 유행이 생겨서, 다른 지역 한 유명한 시인이 여기 와 시를 쓰며 소목=우항을 일러 ‘우황’이라 쓰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우황’청심환도 아니고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우항이라 하지 않고 소목이라 했다면 이런 일은 아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글로 먹고 산다는 시인조차 무슨 말인지 모를 수밖에 없도록 생겨먹은 땅이름이다 보니까 이처럼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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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부 지음 | 집문당 펴냄
국토개발의 현장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땅이름에 관해 연구한 저서. 땅이름의 특성, 땅이름의 분류와 지명어의 소재,땅이름의 어원과 변천,인물과 땅이름 등으로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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