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시(詩)조차 달리 읽게 만드는 거제 지심도

김훤주 2010. 4. 2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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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쟈 봄에는 안 갈란다
동백섬 지심도 안 갈란다
얻을 거보다 잃을 거 더 많은
붉은 나이를 보는 거 같아서
모가지 뚝뚝 부러진
길바닥의 저 슬픔 보기 싫어서
담방담방 물수제비뜨는 바닷새들
파도의 지루함 사이로 섬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막 던져주는 자기 연민이,
한사코 밀어넣는 감정이입이 정말 싫어서
은쟈 봄에는 지심도 안 갈란다
두려움의 다리를 건너 용기를 배운다는데
웬 슬픔이 저리도 흔해 빠졌는지
참말로 은쟈 지심도 안 갈란다  -- '지심도' 전문.

이월춘 시인이 지난해 11월 새 시집 <산과 물의 발자국>을 펴냈습니다. 아마도, 4월 13일 동백으로 이름높은 경남 거제 지심도를 다녀온 뒤끝인 때문인지 그이의 시 '지심도'가 제 눈길에 걸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꽃이 폈다가 지는 그것을 두고, 그렇게 져서 길바닥에 널린 그것을 두고 저렇게 슬픔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얻을 거보다 잃을 거 더 많은 붉은 나이"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습니다.

'지심도' 다녀오기 전이라면, "무슨 감정의 과잉이람……" 이리 여기고 말았을 개연성이 높았을 것입니다만, 그 섬에 들러 곳곳에 "모가지 뚝뚝 부러진" 채로 널브러진 녀석들을 보고 나니 제 마음도 조금은 여려지고 말았나 봅니다.

이런 작품은 어떻습니까? 꼭 지금 계절에 어울리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당하기 버거운 봄의 몸부림입니다.

연둣빛을 확확 뿜어내는 느티나무가 부는 바람을 붙잡아 가지를 흔들어대는 장면을 보고, 제가 사랑하는 여러 여자 가운데 한 분이, "이것들아, 제발 가만 있거라. 그렇게 몸부림을 쳐 대고 안겨들면,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 말이냐" 이러며 부르르 몸을 떨던 것이 생각납니다.

봄이 온다고
산도 마음이 뭉글뭉글해지는가 보다
뿔 돋으려는 어린 사슴처럼
온몸에 소리 소문 없이 길을 내는가 보다

예민한 봄의 말초신경과 맞정情을 나눈다고
이즈음 산들은 몸이 뜨거워진다
물길마다 뿜어내는 봄의 몸 냄새가
숲의 행간을 따라 서서히 번져가는 저 놀라움

산과 물의 길은 연둣빛이거나 노랗다가 붉게 변해 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는 시간들이
봄산의 늑골을 비집고 들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볼 산과 바다의 푸른 어깨여  --'산과 물의 발자국' 전문.


시집 표제작 '산과 물의 발자국'에는 멀리서 지그시 바라다보는 눈길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속살까지 샅샅이 훑어내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습니다.

산은 산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러면서 물길 따라 뿜어내는 그이 산의 발자국 사이에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봄산의 늑골을 비집고 드는 시간'은, 제가 보기에는 아주 탁월한 착상입니다.

아마도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그다지 길지 않은 작품인 '사이'에서 형상화돼 있는 그런 관점이 '산과 물의 발자국'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멀리 떨어져야
가장 멀리 날아가는 건
활시위와 화살의 사이다
과녁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자지러질 때까지
그리하여 만물이 선명해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야
멀리서 꽃봉 터지는 소리 들린다
그대와 나의 사랑의 역설처럼  -- '사이' 전문.

제일 마지막 행은 없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싶기는 하지만요. ^.^


이렇게 작품들을 연결해 읽는 재미가 시인 이월춘의 새 시집 <산과 물의 발자국>에 들어 있답니다. '사이'에서 말하고 있는 "멀리서 꽃봉 터지는 소리"가 바로 표제작 '산과 물의 발자국'이 풀어낸 그 경지가 아닐는지요…….

1957년 창원 출신으로 진해에 사는 이월춘 시인의 나이를 느끼게 하는 그럴 듯한 시도 이번 시집에 들어 있습니다.

갑자기 뇌가 바람을 맞았다는 말
뇌졸중풍
스물한 해 동안 반신불수에 언어장애를 달고 사신
내 아버지가 쉰 줄에 드시자마자 함께 하신 병
온 동네 사람들 혀를 차게 하고
스물한 해를 버티며 어머니를 녹인 병
비가 오면 우산을 써도 웃이 젖는다지만
뒷산에 뻐꾹나리꽃 하늘을 우러를 때
올망졸망 자식새끼들
그날 그 병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네  --'뇌졸중풍' 전문.

슬픈 사연이 담겼건만, 그래서 조금 감기는 듯한 느낌은 주지만 그리 심하게 칙칙하지는 않습니다. 나쁜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일 앞에서 보여드린 바, 동백꽃으로 이름난 거제 지심도 방문 후기 '지심도'도 비슷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나이 덕분인 모양입니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시집 말미 해설 '그리움이라는 생의 버팀목'에서 "좋은 서정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긴장 있는 배치를 통해 감정의 분출을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문학평론가의 얘기니까 대체로 맞는 말이겠지만(맞는 말이라고 쳐 줘야 하겠지만), 이월춘의 시를 읽다 보니 어쩌면 "시인이 감정을 객관화할 줄 알게 되면서 언어의 긴장 있는 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고, 거꾸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스물스물 들어옵니다.

김훤주

산과 물의 발자국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월춘 (문학의전당,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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