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15년 전 지방선거 출마 기억을 떠올리다

김훤주 2010. 4. 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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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마하고 싶어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책장 서랍을 치우는데 조그만 명함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선거용 홍보물이었습니다. 15년 전인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선거였습니다.

지방의원 선거는 91년 치른 적이 있지만 자치단체장 선거는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임기가 원래 4년인데도 이 때는 임시로 98년까지 3년이었습니다.

제가 이 제1회 지방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창원시의회 의원 선거였습니다. 출마하고 싶어서 출마한 것은 아니고요, 그렇다고 누구한테 등떼밀려 나선 것 또한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해서 나선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출마하게 된 사연을 말씀드리려면 제가 나섰던 내동 선거구가 어떤 데인지를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도요.

명함형 홍보물 앞면.


창원시 내동은 창원병원 옆 판자촌(지금은 튤립공원)과 건너편 아파트촌으로 대별됐습니다. 아파트 이름은 내동상가, 올림픽, 목련, 내동주공, 그라미, 동성샛별, 통일사원, 삼미금속, 화천기계 등이었습니다.

통일·삼미·화천은 사원아파트였고요, 나머지 또한 스무 평을 넘지 않는 소형이었습니다. 이 가운데는 5층까지 한 통로씩 10집 정도 사들여서 사원아파트 용도로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동 선거구는 크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유권자가 3000명 남짓이었습니다. 보면 창원대로를 따라 북서-남동으로 길게 뻗어 있고, 끝에서 끝까지는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했습니다.(맞은편 판자촌은 빼고)

실정이 이렇다 보니 젊은 부부가 많았고, 대부분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었으며 아울러 한국노총이든 아니든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창원지부라고, 내동의 공단상가 5층에 사무실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면서 진보진영의 정치적 독립과 노동자계급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활동했습지요.

여기서 진보진영의 정치적 독립이란 진보진영이 자력으로 진보정당을 만들고 민주당 같은 보수야당에게 기대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은 이것이 당연한 지향으로 여겨지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2. 노조 간부가 지방의원 후보를 포기한 까닭

어쨌거나 저와 제가 몸담고 있던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창원지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진영 정치적 독립의 주춧돌로 삼기 위해 바로 이 내동 선거구를 주목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젊은이가 많고 공장 노동자가 많으며 또 사업장 단위로 모여 살 뿐 아니라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경우가 다수라는 데 착안을 하고 후보를 찾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진정추는 가난한 조직이었습니다. 그래도 선거를 위해 500만원 가까운 거금을 들여 지역을 조사·분석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 낼 수 있었는데 결론은 이랬습니다.

"①내동에 사는 ②30대 남성 노동자 ③대규모 사업장일수록 좋고 ④민주노조 소속이면서 간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선다면 당선 가능성이 100%에 가까우며 ⑤고향이 어디인지는 별로 상관없다."

이런 사람을 아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창원에서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 수 있는 그런 정도 규모 있는 사업장 노조에서 부위원장을 하고 있는 35살 노동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단 듯'했습니다. 5월 들어설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조직은 지역 노동조합의 힘을 빌리면 되게 돼 있었습니다. 이런 조직을 저는 하고 다녔습니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정책과 공약을 챙기고 다녔습니다. 전국 수준의 진보적인 의제와 창원시의회라는 단위에 걸맞은 지역 의제를 찾고 동네 민원 사항도 찾아다녔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진보진영 가운데 내동선거구에 착안한 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창원은 물론 마산까지 통틀어서, 노동자가 운동 차원에서 지방선거 후보로 나가는 '효시(嚆矢)'였습니다.

후보 개인과 그이가 소속된 노동조합, 우리 진정추는 호흡도 잘 맞았습니다. 노동조합은 후보를 쉽게 내놓았고 본인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진정추는 선거 기획과 정책·공약 개발 등을 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환상이었으나, 5월 중순 넘어서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후보를 맡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도저히 출마할 수 없겠다고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못 나서겠다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경험 부족도 아니고 현장 출신이라거나 나이가 젊어서도 아니고 학력 때문이다. 노동자 밀집 지역이라 당선은 충분히 될 수 있다 보지만 막상 의회에 들어가 할 일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대졸도 많은데 고졸 출신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없다. 우스갯거리만 되고 말 것 같다."

저희는 완전 비상사태에 들어가서 몇날며칠 설득을 했습니다. 그이가 소속된 노동조합의 간부들도 저마다 제각각 설득을 했습니다. 한 열흘 넘게 붙잡았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될 일이 아님을 알고 포기를 했습니다.

학력(學歷)이 문제였습니다. 공업고등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늘 대학 출신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었나 봅니다. 스스로가 공공의 영역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 열등의식이 가로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3. 이미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나갔다

지방선거 사상 첫 노동자 후보 탄생이 무산되고 나서 저희는 무척 허전했습니다. 1995년 새해 들면서부터 알뜰하게 애쓴 '6월 히트 기획상품'이, 막판에 어그러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넓지도 않은 지역이지만 동네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니며 현장 민원을 챙기는 등 정책과 공약을 만들고 그에 앞서 그야말로 거금을 들여 사전 조사까지 끝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망과 시름을 며칠 동안 술로 달래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직접 한 번 나가보겠다고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진정추 창원지부가 참 우습게 된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든 누구든 나가기만 나가면 당장은 진정추라는 조직을 추스를 수 있을 테고 나아가 잘 풀려 당선까지 된다면 조직에 활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출마하게 됐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 탈 사람이 말을 타지 못하겠다고 하자 마부 노릇을 자처하고 나섰던 이가 '냉큼' 올라타 버린 꼴이 됐습니다만.

4. 선거운동이 힘들기는 했어도 무척 즐거웠다

명함형 선거 홍보물 뒷면.

저는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선거운동을 제대로 못할 줄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선거판이라는 데가 참 재미있는 것이어서 외려 제 성격이 확 바뀌어 버렸습니다.

저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아무튼 무척 즐겁고 재미나게 선거운동을 벌였고 하면 할수록 더욱 즐거움이 샘솟았습니다(물론 많이 힘들기도 했습니다만) 아울러 결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요.

물론 원래 출마하기로 했던 그이가 나왔다면 아마도 당선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나섰을 때와는 달리 중간 공백도 없었을 테고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와 친화력이 저보다 더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섯 명이 나왔는데, 5등만 빼고는 표차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제가 4등을 했는데, 전체 유효투표의 20%를 넘어서 법정 선거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몇 가지 일들이 떠오릅니다. 첫째는 안타까운 것입니다. 명함형 홍보물을 미리 주문을 했는데, 제 때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쇄 맡은 쪽에서 실수한 것입니다. 후보 등록과 동시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는데 홍보물이 없이 거리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초반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던 제게는 거의 치명상이었습니다. 인쇄 쪽에서 착각한 것은 기호였습니다. 후보 등록을 시작하고 사흘인가 있다가 마감과 함께 기호 추첨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인쇄 쪽에서는 기호가 나온 뒤 인쇄해도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후보 등록을 한 시점에서는 모두다 기호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후보들이 기호가 적혀 있지 않은 홍보물을 들고 나갔는데, 저 혼자만 홍보물 없이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하.

5. 선거 치르고 나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들

다음으로는 선거 비용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도 가난했기 때문에 크게 돈을 마련하지 않은 채로 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선거를 마치고 보니 오히려 돈이 30만원남짓 남았습니다.

저희는 유급 선거운동원을 쓰지 않았고 많은 부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노동조합 조직에 기대어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보들처럼 돈으로 사람을 사는 일도 전혀 하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돈이 남기는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정답은 바로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저희 취지에 동감해 십시일반으로 보태주신 데 있습니다. 선거운동을 하러 나간 거리에서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이 1만원 2만원씩 손에 쥐여 주기도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비록 떨어졌지만, 선거 과정에서 했던 '선거 비용 공개' 약속은 지켰습니다. 사용 금액과 잔액이 얼마인지 적은 인쇄물을 집집마다 집어넣었습니다. 남은 돈 30만원으로 100원짜리 볼펜 3000자루를 사서 하나씩 같이 넣었습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전화가 쏟아졌습니다. 이리 깨끗하게 하다니 놀랍다, 약속을 했어도 그냥 하는 말인줄 알았더니 고맙다, 다음에는 꼭 찍겠다, 당신 이름 적힌 볼펜을 두고두고 간직하겠다 등등. 저도 감동 먹었습니다.

감동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안내 공문이 왔습니다. 당선 사례든 낙선 사례든 모든 금품 사례는 선거 뒤에도 불법이니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이미 낙선 사례를 해 버렸는데요.

바로 선관위에 전화를 했습니다. "선거 운동에 쓰고 남은 돈이 30만원 있어서 100원짜리 볼펜을 사서 유권자들에게 집집마다 하나씩 드렸다. 미리 안내 공문을 받았으면 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불법을 했으니 아쉽다."

난감해하기는 선관위가 더했습니다. 자기네가 생각하는 큰 사안이 아니고 100원짜리 볼펜 30만원어치를 돌린, 애교스러운 사안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한참 가만 있더니, 이리 말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 다른 데 얘기하지 마세요."

6. 학벌.학력이 심각한 문제임을 몸으로 겪어 알았다

그나저나 제게는 95년 지방 선거가 아주 특별한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다. 출마하기로 했던 후보가 스스로 그만두는 일을 제가 겪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를 체험 못하고 그냥 스쳐지나갈 뻔했습니다.

그 일로 저는 학벌(學閥)과 학력(學歷-學力과는 다른 개념이지요)이 작은 문제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학벌·학력에 따른 차별이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이런저런 사안에 머물러 있는 정도를 넘어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학벌에 따른 차별은, 이처럼, 사람의 의식 구조까지 깊숙하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고졸은 스스로를 별것 아닌 불쌍한 존재로 여기도록까지 작동하고 스스로 주눅들어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학벌.학력 높은 사람들의 세상 지배를 한결 편하도록 거드는 것입니다. 재산이든 권력이든 학벌이든, 모든 있는 이들의 지배는 이렇게 지배받는 이들의 정신 또는 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완성이 되는가 봅니다.

명함 하나가 주는 기억이 이렇게 글을 엉뚱한 데로 끌어오고 말았네요. 사진을 찍고 나서, 이 명함형 선거 홍보물을 버렸습니다. 15년 전 그 사건은 저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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