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울보다 경남서 더 해야 할 낙동강 사진전

김훤주 2010. 4. 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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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서울 조계사에서 '낙동강 숨결 느끼기-Before & After'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사진전은 지율 스님이 2008년 12월부터 낙동강을 동서남북으로 훑으며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낙동강 상주에서 창녕 함안 창원을 거쳐 부산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부의 포클레인이 파헤치기 이전 모습과 이후 달라진 양태를 바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사진을 두 개씩 대비해 놓았습니다.

어떤 경우는 망가진 정도가 너무너무 심해서 섬뜩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상전벽해라 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버려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장면도 있었습니다.

자연 습지였던 데가 완전 공사판으로 바뀌어 있거나 농부들이 밭이랑을 일구던 땅이 이른바 골재 적치장 또는 채취장으로 탈바꿈이 돼 있기도 했습니다.

1. 토목공사에 사라진 본포 나루 자취

대표로 꼽자면 경북에 있는 구담 습지와 창원 본포 나루터입니다.
구담 습지는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덧붙일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만, 어쨌든 보면 마치 수풀로 울창한 산이 완전 민둥산으로 달라진 위에 상처가 곳곳에 갈라터진 모습입니다.

구담 습지의 예전과 이후. 지율 스님 사진.


창원과 창녕을 이어주는 본포 나루터는 제가 옛 모습을 알기 때문에 몇 마디 더할 수 있습니다.
낙동강에 있던 여러 나루가 다 없어지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나루가 본포나루였다고 합니다.

2000년대 들어서 여기에 본포나루를 재현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아울러 옛날 주막 자리에 찻집이 하나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찻집은 이름이 '알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이를 거점 삼아 문화 공연도 낭송회도 치러지곤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양산 사는 전신마비 장애 최종진 시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낭송회도 있었고, 동요 부르는 어른 모임 '철부지'의 공연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아울러 '본포 나루' 부활을 기원하는 이런저런 문화행사도 열렸고, 학생들이 떼지어 놀러오는 일도 잦았습니다.

이런 기억이, 이번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낙동강 살리기'를 빙자한 토목공사로 깡그리 밀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낙동강 토목공사가 거세게 될 수 있는 근본 원인

저는 전시 이틀째인 3월 30일 조계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더니 지율스님은 이미 <시사인>의 김은남 기자랑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율 스님이 저를 보고 있습니다. 맞은편이 시사인 김은남 기자.

저는 먼저 전시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고, 그런 다음 김은남 기자 옆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김은남 기자랑도 인사를 나눴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저도 김은남 기자를 알고 있었고 김은남 기자도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지율 스님이랑 나눈 이야기가 많지만 지금 여기서는 두 가지만 꼬집어서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낙동강 살리기'이라는 토목공사를 저렇게 잘 할 수 있는 근본 원인에 대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지율 스님은 말했습니다. "낙동강이 지금 저렇게 대책없이 망가지는 포클레인을 온 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사람들이 낙동강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율 스님은 2008년 12월 경북 영덕 토막(土幕)을 나선 뒤로 줄곧 낙동강을 돌아다녔습니다. 지율 스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동차로 휭~ 하고 낙동강을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제방에 있는 도로에서 봐도 이명박 정부의 '낙동강 살리기' 토목 공사가 눈에 띄지만, 2008년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율 스님은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을 돌아다녔습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데까지 들어가서 낙동강을 들여다보고 '낙동강 살리기' 토목공사를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얻은 자료와 사진을 갖고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정부의 대운하 사업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에게 "정부가  대운하 사업을 멈추지 않았고 어떤 명목으로든 이어가려고 토목 공사를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고 얘기했으나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008년 촛불 국면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몸소 나서 "대운하 사업은 국민이 반대하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상태였고 적어도 표면으로는 다른 두드러진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율 스님은 말합니다.

또다른 인터뷰 장면. 뒤로 토막난 나무들을 담은 사진이 보입니다.


"그러나 멈춘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함안보 착공식이 2009년 12월 있엇지만 실제로는 2008년 4월 이전에 모든 것이 완료돼 있었습니다. 화물차 드나드는 길도 완성돼 있었고 철근은 규격에 맞게 잘린 채로 대기 중이었습니다. 보(洑)라고 할만한 것만 가시화돼 있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함안 공사 현장의 예전과 지금. 지율 스님 사진을 찍은 사진.

함안보를 비롯해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지는 '낙동강 살리기'를 빙자한 토목공사가 이토록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근본 원인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원·부자재들이 맞춤 상태로 모조리 준비돼 있었기 때문에, 마치 조립식 건물처럼, 착공을 한 다음부터는 짜맞추기만 하면 되는 그런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낙동강을 실제로 알고, 그리고 아는 만큼 낙동강의 속살을 깊이 있게 사랑하게 됐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낙동강을 저토록 숨가쁘고 가파르게 망가뜨리는 이명박 정부의 거친 손찌검을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고,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지율 스님이 말하는 낙동강이 지금 저토록 처참하게 망가지는 근본 원인입니다.

3. 사랑도, 반대도, 알아야 할 수 있다

저는 사진전을 뭣 하러 여시느냐고 어리석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지율 스님은 아주 현명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을 만난 얘기를 했습니다.

김종철 발행인이 지율 스님 사진을 보더니 이랬답니다. "스님, 지금 이것이 제일 급합니다. 사람들은 낙동강 강가에서 지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서둘러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4대강 살리기, 낙동강 살리기도 말만 있고 4대강 살리기 토목공사 반대, 낙동강 살리기 토목공사 반대도 말만 있습니다. 정부는 보여주지 않고 환경단체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조계사 나무 갤러리 전시 모습.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리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알게 되면 낙동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왜 반대할 수밖에 없는지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율 스님은 조계사에 전시하는 패널 34개를 만드는 데 실비가 100만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명동성당과 원불교 등 몇몇 군데에서 실비로 패널을 장만해 곧바로 전시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4. 서울 말고 경남서도 한 번 해보자

조계사 나무 갤러리 내부 전시 모습.


경남에서는 누가 전시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지율 스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저도 지율 스님의 낙동강 알리기에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100만원을 마련해 볼 테니 제게 패널을 좀 보내 주시지요." 말씀했습니다. 스님은 두 말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돈을 먼저 보내 드릴 테니 받으신 다음에 사진 패널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지율 스님은 돈을 받고 어쩌고 하면 때를 맞추지 못할 수가 있으니 바로 작업을 해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제게는 돈을 장만하고 전시할 장소를 정하고 전시할 인력을 찾아내고  경남 전역을 아우르는 전시 계획을 세우는 일만 남았습니다.

낙동강 사진전을 서울에서만 해야 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란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낙동강이 흘러가면서 숱한 지류와 개울을 쓸어담으며 삶터가 돼 주는 경남에서 먼저 나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낙동강을 아끼는 많은 눈길과, 
     지역 생태를 사랑하는 숱한 발길과, 
     경남의 앞날을 보람차게 만들려는 엄청난 손길들이 
     함께 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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