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유아학과는 있는데 노인학과는 왜 없나

김훤주 2010. 2. 21.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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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치매 다룬 책에서 눈길 끈 대목

전희식이 쓴 책 <엄마하고 나하고>를 읽었습니다. 치매를 앓는 22년생 개띠 어머니를 이태 남짓을 혼자 모시면서, 같은 개띠인 58년생 막내 아들이 쓴 책입니다.  어머니는 아래몸통까지 제대로 쓰시지 못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전희식은 어머니와 치매를 일거리로 여기지 않았고 대신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잘 하고 나아가 그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공부했습니다.

<엄마하고 나하고>를 읽으면서 제 눈길이 끌렸던 대목을 옮겨 적어 봤습니다. 다른 많은 여러분에게도 여기 이 글들이 눈길을 끌어주기 바라면서요.

"지금의 우리는 타인과 구별되고 차이가 생길 때 자기가 누구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데, 동학의 개인은 내가 남을 모실 때 비로소 내가 생겨나게 됩니다. 모실 수 있는 타인의 존재가 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됩니다."('추천사 1'에서)

"낳고 길러준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간의 예의를 다하는 전희식의 봉양이 오늘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망가졌기 때문일 것이다."('추천사 2'에서)

관련 글 : 어머니의 치매를 스승으로 삼았다(http://2kim.idomin.com/1411)

1. 과거에 매달리지도 미래에 걸지도 말고

"우리의 기억력은 참 허약하다. 내 욕망의 그물망에 걸린 경험만 기억한다. 어머니의 욕망은 단순하다. 늘 현재형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입에 '미친 놈'으로 담기기도 하고 '은인'으로도 오르내린다.
"너 아니믄 내가 일찍 죽었을 끼다. 니가 날 살렸다"면서 새벽녘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애달파 하신다. 그러다 한 숨 자고 나면 표변하신다. 삶이란 그냥 한 바탕 꿈인 것을 온 몸으로 증언하신다.

어머니는 여든일곱 쇠잔한 몸을 부추기며 흩어진 기억을 뒤죽박죽으로 긁어 모아 격한 감정을 동반해 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어제 내가 한 선행을 잊으라는 것. 어제 내가 빠졌던 유혹을 넘어서라는 것. 어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더 이상 상심하지 말라는 것. 내일도 모레도 다 허상이요,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여기가 온전한 삶이라는 것.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내 미래라는 것. 기억 저 밑바닥으로 침전된 경험들은 정화의 과정에 던져진 것. 잊힘을 자축하라는 것.

실체가 아닌 것들을 왜 짊어지고 끙끙대냐고 오늘도 어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내게 이르신다."

2. 우연은 우연인 것처럼 여겨질 따름

"어떤 우연이 생겨나기까지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여러 인연법이 작용한 결과이며 같은 종류의 다른 일들을 연이어 일어나게 한다.

한 가지 파동은 같은 파동의 다른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는 얘기다. 뉴턴 역학의 관성의 법칙이기도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기도 하다. 뜻을 바로 세우고 전념하면 모두 이뤄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부정적인 사고를 금하고 긍정과 관용의 습관을 키우라는 조언들도 이 같은 원리에 기초한다."

3. 장애인이 없는 나라라고?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는 장애인이 없다며 건강한 나라가 부럽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외국인도 가는 곳마다 걸림돌이 있고, 어색하고 서툰 시선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밖에 나오지 못하는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현실을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4. 노인도 느낄줄 알고 판단할줄 안다

"노인 시설에서 노래 강사로 활동하는 저자가 한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였다.

'…나를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당신이 하는 일을 눈치도 못 채는 듯 보이고 항상 벗겨지는 양말, 별로 영리하지 못한 움츠러든 늙은 노인, 먼 곳을 보는 듯한 눈과 변덕스런 습관, 대답을 잘 못하고 음식은 흘리고, 당신이 하라는대로 움직이고 당신이 먹이는대로 받아먹지만 나는 말하리라.

열여섯 살 소녀 때에는 발에 날개를 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나리라 꿈을 꾸었고, 뛰는 가슴을 안고 스무 살 신부가 되어 기쁜 가정을 이루었다고. 내 어린 자식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쉰 살에 내 무릎 밑에는 손자들이 놀았다고.


나는 기억하오. 즐거웠던 순간들과 쓰라렸던 시간들을. 그리고 아무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 쭈그러진 노인으로만 보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봐 주시오.'


노인의 일기에서 보듯 늙고 병들면 노인의 느낌과 판단은 무시된다.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관계자들의 편의를 중심으로 일들은 진행된다."

5. 치매는 자아를 되찾으려는 발버둥이다

"사실 치매는 자신을 제압하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면 그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도피처가 망각이 될 수 있다. 대응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아채고는 외면과 저항, 과도한 공포감과 무시, 의심, 외고집을 통해 분열적 자아를 되찾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다."

"잠 속에서 진행되는 망상이 꿈이라면 눈 뜨고 진행되는 망상은 치매다."
 
"치매 노인들의 정신세계에 틈입하는 망상들은 현실에서 좌절된 기억들이다."

6. 믿음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한 치매 어머니

아래 몸통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치매 어머니와 나선 여행길에서.

"어머니는 천연덕스럽게도 내가 꺼내 놓은 파스에다가 분을 골고루 뿌렸다. 새하얀 분가루가 상념처럼 날렸다. 분이 발린 파스를 시키는 대로 어머니 발목에 대고 붕대로 감았다.

무섭게 부어오르고 시커멓게 멍이 들었던 어머니 발목은 보름 이상 갈 거라는 내 예상을 뒤집고 다음날 거짓말처럼 나았다. 여든 일곱 노인네 몸에 기적이랄 수밖엔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6년여 전.
서울 형님 집에 들렀다가 작은 방에서 기저귀를 차고 종일 누웠다 앉았다만 반복하고 있는 어머니가 내게 하소연을 했었다. "오줌 나오는 데가 너무 따갑다"고 해서 어머니의 수줍은 손길을 제치고 살펴보다가 헐어 있는 어머니의 아랫도리에 큰 충격을 받고 시골집에서 내가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했던 그 날, 내가 사다 발라드렸던 바로 그 3000원짜리 분 한 통이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분통을 똘똘 다시 뭉쳐 싸더니 장롱 깊숙이 숨기셨다. 몇 년 동안 나조차 모르게 숨겨 두셨던 이 분통이 세상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을 소생시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여성의 부끄러운 곳의 고통을 치료해 준 분통을 세상의 명약으로 등극하게 한 힘은 믿음과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7. '아, 그래요?'의 힘, 상대를 긍정하면 자유를 얻는다

"공생공락. 모든 이와 더불어 즐겁게 산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겠는가. 그러자면 첫째도 둘째로 오직 하나, 자기 생각이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할 것이다. 내가 어머니랑 살면서 생기는 수도 없이 많은 심적 충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이 내 예측과 판단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데 있다.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것을 나는 '아, 그래요?'에서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뭐라 그러든 무조건 '아, 그래요?' 하고 대꾸를 하고보면 상대방의 처지가 얼핏 보인다.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아, 그래요?'라고 하면 상대방이 자기 조건에서 늘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무슨 마술 같았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으랴 싶었다."

8. 좋은 부모보다 좋은 자식이 먼저 돼야

이밖에 전희식은 부모 학교보다 자식학교를, 좋은 부모 되기보다 좋은 자식 되기를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합니다. 어른이 좋은 자식이 되면 아이들도 좋은 자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입지요.

어버이들이 좋은 부모 되는 데 온통을 신경을 쓰는 사이에 그 어버이의 어버이들은 소외와 무관심에 맡겨져 버리고 맙니다. 아이들 보고 배우는 것이 이러한데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된다 한들 무슨 사는 보람이 있느냐는 말을 합니다.

전희식은 보육학과나 유아교육학과는 있는데 노인학과는 왜 없느냐고 묻습니다. 노인들 특성과 장점 단점을 잘 연구해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할 수도 있고 노인들을 제대로 섬기는 노릇도 익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전희식은 그러나 이런 노인학과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생기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현실이 주는 높고 두터운 장벽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에게 주어진 자리가 얼마나 비참한지 실감하게 합니다.

김훤주

엄마하고 나하고 - 10점
전희식 지음/한국농어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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