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어머니의 치매를 스승으로 삼았다

김훤주 2010. 2. 1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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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데다 아래 몸통마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팔순 어머니와 쉰 줄에 들어선 아들이 같이 살면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생기고 무엇이 남을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바를 훌쩍 뛰어넘는 실체를 담은 책이 나왔습니다.

1922년생 어머니 김정임을 1958년생 막내 아들 전희식이 시골집에서 모시고 살면서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엄마하고 나하고>가 담았습니다. 태어난 해를 꼽아 보니 어머니와 아들이 모두 개띠네요.

전희식은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매이지 않는 하나뿐인 길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매이지 않는 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전희식에게 치매는 치매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매가 문제라면 그보다 더한 문제(=미망)를 떨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전희식에게 어머니의 치매는 그냥 특별한 정상(情狀)일 뿐이랍니다. 어머니와 치매를 통해 전희식은 세상 이치를 통절하게 느끼고 삶을 사는 자세를 가다듬어 나갑니다. 어머니와 치매는 그래서 전희식에게 고마운 존재가 됩니다. 이런 깨달음이, 어머니와 치매를 통해 전희식에게 불쑥 와락 슬그머니 야금야금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전희식.

"생각을 내가 하는 경우보다 불쑥불쑥 나를 점령하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경우가 많은 건 아닐까?

삶의 많은 부위는 실체가 아니고 생각의 영역입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은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의 생각이 빚어내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이 만들어 낸 삶을 살면서 얼토당토않은 괴로움과 좌절과 미움을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와 살면서 다시금 알게 됩니다.

생각을 잘 하되 그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자유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전희식이 어머니에게 생각으로 이런저런 기대와 예상을 품었다가 그것이 어긋나면 괴로움과 좌절과 미움이 샘솟습니다. "내가 어머니랑 살면서 생기는 수도 없이 많은 심적 충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이 내 예측과 판단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데 있다."

전희식은 이것을 깨쳤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자기 생각이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평상심.

치매 걸린 어머니를 두 해 남짓 모시면서 전희식은 느꼈습니다. "사실 치매는 자신을 제압하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면 그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도피처가 망각이 될 수 있다. 대응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아채고는 외면과 저항, 과도한 공포감과 무시, 의심, 외고집을 통해 분열적 자아를 되찾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말과 행동과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좌충우돌이라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희식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일관된 한 무엇을 찾아내고 그것을 깨달음으로 이어나갑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십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참 허약하다. 내 욕망의 그물망에 걸린 경험만 기억한다. 어머니의 욕망은 단순하다. 늘 현재형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입에 '미친 놈'으로 담기기도 하고 '은인'으로도 오르내린다.

'너 아니믄 내가 일찍 죽었을 끼다. 니가 날 살렸다'면서 새벽녘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애달파 하신다. 그러다 한 숨 자고 나면 표변하신다. 삶이란 그냥 한 바탕 꿈인 것을 온 몸으로 증언하신다.

어머니는 여든일곱 쇠잔한 몸을 부추기며 흩어진 기억을 뒤죽박죽으로 긁어 모아 격한 감정을 동반해 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어제 내가 한 선행을 잊으라는 것. 어제 내가 빠졌던 유혹을 넘어서라는 것. 어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더 이상 상심하지 말라는 것. 내일도 모레도 다 허상이요,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여기가 온전한 삶이라는 것.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내 미래라는 것. 기억 저 밑바닥으로 침전된 경험들은 정화의 과정에 던져진 것. 잊힘을 자축하라는 것.

실체가 아닌 것들을 왜 짊어지고 끙끙대냐고 오늘도 어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내게 이르신다."

이밖에도 치매에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어머니랑 여행을 다니기까지 한 얘기, 어머니를 모시면서 서로 힘들었던 과정들, 치매를 다스리는 이런저런 효과 있는 방법, 어머니와 여행하면서 느낀 우리나라 장애인의 처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허실 따위까지 담았습니다.

전희식은 서문에서 "치매 어머니와의 개인 생활을 축으로 하되 이를 충분히 농촌 문제, 노령화 문제, 가족 해체의 문제로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것은 이 책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 역량의 한계입니다"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겸손한 수사(修辭)에 가깝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으랴 싶었다." 전희식이 김정임을 모시면서 얻은 큰 깨달음이겠습니다. 이 깨달음의 밥상을 그이는 우리 앞에도 펼쳐 보였습니다.

어머니의 치매가 전희식에게는 스승이 됐습니다. 전희식은 80년대 노동자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는 1985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투쟁 주역 가운데 한 명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가 달라지는 일도 무척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국농어민신문. 272쪽. 1만2000원.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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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하고 나하고 - 10점
전희식 지음/한국농어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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