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학교는 과수원과 닮은꼴이다

김훤주 2010. 2. 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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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 과수원에 가면 단감나무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람들은 단감나무 껍질을 벗기고 지난해 웃자란 가지를 치기 시작합니다.

껍질 벗기기는, 나무에서 벌레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는 나중에 열매를 손쉽게 따려고 하는 노릇입니다.

여기 단감나무를 가만 들여다보면 보통 나무들과는 다른 구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벌어져 나가는 자리가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단감나무가 원래부터 그런 줄 압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90년대 후반 창원 대림자동차 공장 뒤쪽 산비탈에 단감나무를 심어봤기 때문에 압니다.


단감나무도, 태생은 여느 시골에서나 예사롭게 만나지는 일반 감나무처럼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사람들이 관리하고 수확을 하는 데 편하려고 지금 이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단감나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단감나무는 지금처럼 사람 무릎 높이에서 갈라지지 않고 허리께에서 벌어져 나갔습니다.

사과나무도 배나무도 그랬습니다. 포도나무는, 지금은 허리 높이로 낮춰져 있지만, 그 때는 사람 키 높이보다 조금 야트막하게 키웠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이를 두고 농사 기술의 진화(進化) 정도로 여기겠지만 저는 퇴보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원래 생겨 먹은 원형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 편의를 위해 원래 생겨먹은 형태를 더욱 희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생산 지상주의 관점에서 벗어나면, 생산은  무조건 좋다고 여기는 생각만 버리면 충분히 이렇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옛날 과수원, 옛날 단감나무가 더 좋습니다. 옛날에는 사람 허리 높이 언저리에서 가지가 갈라지도록 했기 때문에, 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들여야 했습니다.

단감을 따려고 자주 까치발을 해야 했고 어떤 때는 사다리를 들고 다니면서 위로 올라가 따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손쉽게 딸 수 있도록 나무 높이를 낮춘 때문입니다.

수확하는 데 좀 힘이 들기는 하지만, 옛날이 좀 더 인간적이고 정감이 묻어난다고 저는 여깁니다. 단감나무 원래 본성을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과수원에서 단감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어떨 때는 아이들 오골거리는 학교가 떠오르곤 합니다. 학교의 으뜸가는 구실은 사회화에 있습니다.

사회화란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기 위해 언어와 예절 등 교육을 통해 한 사회의 문화를 익혀 나가는 과정'을 이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말할 필요는 사실 없지요.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자기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언제나 다 하고 살 수는 없도록 합니다. 상대가 있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상대가 싫어하거나 공동체를 해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노릇입니다.

이런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가 학교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꼭 알아야 하는 것들, 공동체와 자기 개인이 더욱 풍성해지고 좋아지는 기본 지식과 방법을 일러주는 데도 학교입니다.

그러나 지금 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보다는 상대를 해치거나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파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형 인간, 경쟁에 걸맞은 인간, 자본의 집적과 집중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맞지 않는 인간들은 아주 손쉽게 뒤로 밀어내 버립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이 아주 손쉽게 데려다 쓸 수 있는 그런 인간을 길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을 아주 왜곡해 버립니다. 인간 본성을 더럽히고 맙니다.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인간과 세상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교육을 합니다.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을 생산이나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해도 이것은 사회화가 아닙니다.

알맞은 수준에서 멈춰야 하는데, 나아가 협력과 연대의 값어치를 높게 여기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자본의 도구나 노예로 길들이는 정도로까지 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를 적당하게 사회화하는 학교는 사람 허리 높이에서 단감나무 가지가 벌어지도록 기른 옛날 과수원 같습니다.

반면 사회화를 넘어서 자본의 도구나 노예가 되도록까지 아이를 길들이는 그런 학교는 무릎 높이에서 어거지로 가지를 벌려 놓은 요즘 과수원 같습니다.

물론 ^.^ 이런 따위는 저 같은 덜 떨어진 인간이 그냥 혼자만 해 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돼 먹지 못한 상상력의 소산일 따름입니다만.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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