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나도 이제 책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훤주 2010. 1. 1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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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7일 '텔레비전을 보다가 전유성이 좋아졌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10월 20일 KBS1 TV 아침마당 <화요 초대석>에서 엄용수가 선배인 전유성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듣고 서늘해졌던 느낌을 적었습지요.

"아 그 선배는, 책도 많이 읽고 책 선물도 많이 해요. 언제나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지요. 후배들한테 '야, 이 책 좋더라.' 하면서 던져 주고 '야, 이 책 아주 재미있더라.' 하면서 건네준단 말이죠."

"그런데 선배 집에 가면, 책이 하나도 없어요. 깨끗해요. 텅텅 비어 있어요. 왜냐고요? 책 보고 나서 집에 책꽂이에 꽂아두는 게 아니라 짚히는대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줘버리니까요."  

그 때 저는, "웃자고 한 얘기겠지만 전혀 우습지 않았다"고 하면서 "몸이 좀 서늘해졌고 머리는 좀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빈틈없이 꽂혀 있는 제 책장 제 책꽂이가 순간 떠올랐을 뿐"이라 했습니다. 욕심으로 놓지 못한 채 부여잡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도 한 200권 있습니다. 많다 할 수는 없지만 적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1985년 서울구치소 도서열독허가증이 붙은 속표지. 그냥 '팩트'일 뿐입니다.

당시 전유성 관련 글을 쓸 때까지 한 달 가까이 생각을 했는데도 아깝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전유성이 똑똑하고 따뜻하고 깨달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저도 책을 꼭 내 소유로 하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갖고 있어봐야 한 번 읽은 책은 장식용에 그치기 십상이거든요. 그러면 그 책은 책으로서 값어치를 다하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요.

아는 사람이 글쓰기를 새로 공부해 보고 싶다고 말해 준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12월 5일 전후였지 싶습니다. 볼만한 책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얘기 좀 해달라고도 한 것 같습니다.

생각을 해 보니 관련되는 책이 제게 몇 권 있었습니다.

<우리 글 바로 쓰기 3>과 <바른 말글 사전>이었습니다. <우리 글 바로 쓰기 3>은 1995년인가 글쓰기를 완전 새롭게 공부할 때 교과서로 삼았던 책입니다.

표지.

서지.


그리고 <바른 말글 사전>은 제가 <경남도민일보> 들어와서 한 때는 바로 옆에 두고 늘 뒤적거리던 책입니다. <바른 말글 사전>은 제가 <경남도민일보> 들어온 기념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배 설미정이가 장만해준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서명.

서지.


아주 짧은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설미정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도 잠깐 스쳤습니다.
그러나 곧장 접었습니다.

그래, 갖고 있어봐야 먼지밖에 더 만들지 않을 텐데. 그래,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집착밖에 생기지 않을 텐데. 그래,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저것들이 책 노릇을 더 하지 못할 텐데.

강을 건너고 나서도 뗏목을 이고 가는 수고를 일부러 할 필요는 없잖아, 미정이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강을 건너는 다른 사람에게 뗏목이 제 구실을 하기를 더 바라겠지.

그래,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면 한 번 더 책으로 태어날 텐데. 그래, 글쓰기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면 한 번 더 선생 노릇을 톡톡히 할 텐데. 그래, 새 사람에게 가면 한 번 더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나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따위 일도 아마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처음 헤어지는 책들이다 보니, 그리고 제 글쓰기를 완전히 바꿔놓은 책들이다 보니, 이리 호들갑을 한 번 떨었습니다.

너무 늦어지기 전에, 얼마 되지 않기는 하지만 제가 가진 책들 목록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고 필요하신 분들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택배로 부쳐달라시거든 착불로 보내면 되겠지요. 하하.

제가 '창간호'를 모으는 취미도 있는데요,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무슨 대단한 고서들을 사서 모으는 정도는 전혀 못되고요 그냥저냥 살면서 닥쳐지는대로 꽂아두는 식이었는데, 이것도 곧바로 목록으로 만들어 올리고 필요하신 분들께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아끼던 책을 한 번 넘기고 나니까 다음은 쉽네요. 김동인 소설 <감자>에 나오는 주인공 '복녀'가 겪은 것처럼, 아무리 심한 노릇이라도 첫 걸음이 어렵지 나머지는 그냥 자동이네요. 

책을 받아가준 사람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이러면 혼자서 착한 척 잘난 척하면서 갖은 꼴값을 떤다고 하실 수도 있지만, 이리 한 번 말씀드려 놓으면 제가 다시 마음 거꾸로 먹지는 못하는 효과는 내겠지 싶어서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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