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제발, 그 놈 출사표 좀 그만 던지자"

김훤주 2008. 4. 2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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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에서 총선 '출사표를 던지는' 공민배 전 창원시장.

4월 9일 치러진 18대 총선에서도 여느 선거와 다르지 않게 숱한 사람들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우리 <경남도민일보>에서 검색해 봤더니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출사표'가 '던져'졌더군요. 물론 운동경기에서도 출사표는 종종 던져집니다.

사람들은 출사표를 두고 싸움을 한 판 붙어보겠다는 뜻을 밝히는 글쯤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반쯤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출사표는 도전장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한 판 붙자고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출사표(出師表)는, 군사를 내어 나아갈 때 장수가 임금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던져도 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올리는 글 아니면 드리는 글이라 해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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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출사표 던지는' 장면. 주인공은 오른쪽 롯데 감독.

출사표로는,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유비 아들 유선 후주(後主)에게 올린 글이 이름나 있습니다. 전(前)과 후(後) 두 출사표가 있습니다.

연의(演義) 삼국지에는 전과 후 출사표가 모두 나오고 진수가 쓴 역사 삼국지에는 전 출사표만 들어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출사표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이른바 충신이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절절하게 진정어린 마음을 담은 글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이것을 제갈공명이 유선에게 줄 때 '툭', 던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주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출사표를 던졌다."는 그야말로 무식한 표현입니다. 출사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로 쓰는 게으른 표현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다른 기자들 쓰니까 그대로 따라쓰는 뻔뻔한 표현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표현이고 무엇이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보도 매체 종사자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뻔뻔한지를 모르다 보니, 신문 방송을 보는 많은 이들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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