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사이판 총격 '피해자 권리장전'으로 이어질까?

기록하는 사람 2010. 1. 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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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2006년 12월 29일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날 아메리칸항공 소속 비행기 여러 대가 심한 폭풍으로 달라스에서 오스틴으로 회항했다. 그러나 탑승객들은 착륙 후 비행기 안에 여러 시간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공항의 사정으로 조종실이 탑승구를 빼올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음식과 음료수는 부족했고 화장실은 흘러넘쳤다. 일부 비행기는 착륙 후 8시간 넘게 기다린 후에야 승객들을 내보냈다.

아메리칸항공 1348기에 타고 있던 부동산 중개인 케이트 하니는 화가 났다.

그녀는 사건 후 문제의 항공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오스틴 지역신문인 <아메리칸 스테이츠먼>에서 짤막한 관련기사 하나를 찾아냈다. 하니는 그 기사에 두 개의 의견을 올리고, 그날 승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의견은 기자가 쓴 원 기사보다 네 배 이상 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의견 말미에 이렇게 썼다. "이 비행기를 타셨던 분은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항공승객 권리장전'으로 이어진 아메리칸항공 사건
 
이번에는 같은 비행기를 탔던 승객 한 사람이 하니에게 직접 댓글을 달아 더 많은 승객들 연락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니는 며칠 만에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해 그룹을 결성했다. 이른바 '항공승객 권리장전'을 위한 동맹이었다. 그녀는 온라인 진정서를 만들었다. 첫 달에만 2000명 이상이 서명했다. 문제의 사건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승객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뉴욕타임스>, CNN, CBS는 하니와 회원들을 인터뷰했고, 다양한 여행관련 사이트들이 이 동맹블로그에 링크를 걸었다.


그 결과 그들이 제안한 '항공승객 권리장전'은 미국 상원과 하원에 상정됐고, 이후 이와 같은 사건이 터지면 언론은 으레 단일 사건으로 취급하기보다 더 큰 문제의 일부로 다루고 있다. 2007년 밸런타인데이에 제트블루 항공기사 활주로에 갇히면서 승객들이 고생한 사건이 일어나자, CEO는 사임했고 회사측은 자체적으로 '항공승객 권리장전'을 채택했다.(클레이 서키 지음, 송연석 옮김,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2008)

이 사례는 인터넷에 블로그를 비롯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가 생겨난 이후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 중 하나일뿐이다. 이 일을 자신의 책에서 소개한 클레이 서키는 "이제 개인은 카메라나 키보드만 있으면 비영리단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

그런데,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2008년 촛불집회 때 농심 사건이 그랬고, 7만 7000명의 회원이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른바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으로 반신불수의 처지가 된 마산의 학원강사 박재형(39) 씨 문제가 인터넷을 통해 소리없는 시민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으로 총탄이 척추를 관통해 반신불수의 처지가 된 박재형 씨와 그의 아내 박명숙 씨. @한사의 문화마을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이란 2009년 11월 20일 박재형 씨와 그의 친구들이 한국나이 40세가 되는 해를 기념하여 지난 4년간 매월 4만 원씩 부어온 곗돈으로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미국령 사이판에서 무장괴한의 총기난사로 한국인 관광객 6명이 총탄과 파편을 맞아 중경상을 입은 사건을 말한다. 특히 총탄에 척추를 관통당한 박재형 씨는 수차례에 걸친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평생 하반신 마비상태로 살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총기관리와 치안소홀로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사이판 정부나 자국민 보호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 그리고 위험지역으로 피해자들을 데려간 하나투어 여행사 등 어느 한 곳도 책임지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치료비조차 300만 원이 한도인 여행자보험에 미뤄버렸다. 언론 역시 사건 발생 자체만 보도했을뿐, 피해자들의 이런 처지에 관심을 보이는 곳은 거의 없었다.

블로거들이 나서 인터넷 여론 확산…언론도 합세
 
그러던 중 지난 12월 14일 지역신문인 <경남도민일보>에 박재형 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되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곳은 '블로고스피어(블로거들의 사이버 소통공간)'였다. 경남 진해에서 활동 중인 블로거 '실비단안개'는 외교통상부와 사이판관광청에 항의 메일을 보내는 한편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과 블로그에 기사를 링크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박재형 씨가 블로거 정덕수 님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보라미랑


이어 <시사인> 고재열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 '독설닷컴'
을 통해 이 문제를 알렸고, 포털 다음의 파워블로그인 '한사 정덕수'  'Boramirang'은 박재형 씨가 입원 중인 서울대병원을 직접 찾아가 후속취재를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 사건을 알려나가고 있다. 특히 양희은 노래 '한계령'의 노랫말을 쓴 시인이기도 한 정덕수 씨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지금까지 13건의 관련 기사를 연속보도 형식으로 발행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아내 박명숙 씨에게도 블로그 운영방법을 가르쳐 주고 포털에 안타까운 사연을 직접 송고하도록 돕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부산지하철노조 블로그인 '땅아래'는 지난해 11월 부산 사격장 화재사건으로 숨진 일본인 관광객들과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의 해결과정을 비교하는 글을 올렸다. 즉 일본인 피해자들을 위해 부산광역시가 원래 없었던 '특별조례'까지 만들어 거액의 보상금 지급과 공무원 및 공기업 직원상대의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알린 것.

'흑백테레비'는 해외여행 중 범죄피해자 보상제도의 허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고, 남태평양의 섬나라인 바누아투에서 활동 중인 '블루팡오' 네덜란드에 살고있는 '펨께' 등 해외블로거들도 각각 우리나라 자국민 보호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한사 정덕수 님이 만든 배너.


이들 블로거가 쓴 글 중 10여 건이 포털 다음뷰의 '베스트'에 걸렸고, 또한 아내 박명숙 씨가 쓴 '사이판 총격 피해자 아내가 전하는 첫 소식'을 비롯한 5건의 글은 다음의 메인페이지에 편집돼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사이판 총격사건 관련 글에 이어지는 트위터의 리트윗 행렬.

단문 SNS 사이트인 트위터
에서도 이 사건이 여론화하고 있다. '사이판정부에도 무시당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글은 무려 80여 명 이상이 리트윗(RT : 재배포)했으며, 박명숙 씨가 쓴 '사이판 총격 피해자 아내가 전하는 첫 소식'도 70여 개의 리트윗을 받았다.

리트윗이란 트위터 사용자가 널리 알리고 싶은 글 앞에 'RT'라는 영문을 표시하고 발행하면, 자신의 트위터를 구독(팔로워)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글이 노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5000명의 팔로워를 가진 사용자의 리트윗은 5000명에게 노출되고, 그 5000명 중 누군가가 다시 그 글을 리트윗하면 자신의 구독자에게 재배포되는 것이다. 따라서 트위터를 통해서도 적어도 수만 명이 박재형 씨의 사연을 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언론도 서서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사이판 총기난사 피해자의 슬픈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했고, <시사인>'억울하면 인터넷에 호소하라는 외교부'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디어오늘>은 '잊혀진 사이판 총격, 블로거가 나섰다' 는 기사를 썼으며, 지상파 방송과 잡지들도 취재를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만 명을 목표로 서명을 받고 있는 다음 아고라 청원도 최근 1600명을 넘어섰다.
 
인터넷서 불붙은 주권운동,  전문가 참여가 관건
 

아고라 청원 위젯.

그러나 한계도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있는 블로거들은 더 많은 여론 확산을 위해 아고라 청원 위젯 배포와 배너 제작 등에 나서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사이판 여행객이 급감하게 되면 사이판 정부에서 부산광역시의 사례처럼 새로운 조례나 제도를 만들 수도 있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국정부가 입장을 선회해 사이판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할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비판 여론 확산을 우려한 여행사가 약간의 위로금 정도로 무마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앞서 예를 든 아메리칸항공의 사례처럼 '해외여행 사고 피해자 권리장전'을 마련해 업계와 정치권을 상대로 채택운동에 나서거나, 우리나라 정부의 허술한 '자국민 보호 프로그램'에 대한 개선·보완대책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해당분야 전문가들의 참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모처럼 인터넷에서 불붙은 '소비자 주권·국민 주권운동'이 몇몇 블로거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지, 새로운 '권리장전' 채택으로 이어질 지 지켜볼 일이다.

※피해자 가족 카페 : '사이판 총격사건ㅡ그 후 더 붉어진 눈물' ☜위로와 응원의 글을 남겨주세요.
※다음 아고라 청원 : '사이판 총격피해 한국인에게 대책을' ☜서명에 참여해주세요.
※사이판 : 북마리아나관광청 자유게시판 ☜한국인으로서 항의글을 남겨주세요.

아래는 현재 이 사건의 해결에 힘을 보태고 있는 블로거와 글들입니다.

▶김주완 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사이판 총기난사, 누가 책임져야 할까?
총기난사 피해자 "한국 네티즌의 힘을 보여주세요"
사이판 총기난사 피해자의 안타까운 사연
사이판 총격사건 블로거들이 나섰다
사이판 총격 여행사 "위로금 지금 논의중"
신문·방송이 침묵하면 블로그가 외친다
사이판 정부에게도 무시당하는 대한민국
사이판 총기난사, 여행사가 언론접촉 막았다
기자들이 사이판 총격사건에 무심한 이유는?
트위터에서 'RT 폭탄' 맞아보셨나요?
사이판 총격사건, 언론·커뮤니티로 확산
사이판 총격 '피해자 권리장전' 가능할까?

▶Boramirang의 내가 꿈꾸는 그곳
장로정부 눈에 비친 '사이판'은 미국일 뿐
이 나라, 나의 나라 '나의 조국' 맞습니까?
용산참사 355일 '사이판' 총격사건 해결은?
처음 공개하는 사이판 총격 'CT영상' 충격

▶고재열의 독설닷컴
사이판 여행 중 총맞은 여행자가 진짜 억울한 이유
해외에서 사고 당하면 인터넷에 호소해야 하는 이유

▶땅아래
일본인을 위해선 모금하고, 한국인은…

▶femke/펨께의 나의 네덜란드 이야기
네덜란드인이 사이판 총격사건 피해자였다면

▶미디어오늘
잊혀진 '사이판 총격' 블로거가 나섰다
▶블루팡오의 행복의 섬, 바누아투에서 행복찾기
내가 한국인이기에 겁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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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없는 '사이판총격'-관심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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