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여성 시인의 연애는 무슨 색깔일까

김훤주 2010. 1. 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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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대세입니다. 아니 여태껏 사랑이 대세가 아닌 적은 없었으니까 그건 전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요, 이제 사랑 표현조차도 공공연한 게 대세인 모양입니다. 시인은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그러나 저의 <연애>는 늘 봄입니다"라 적어 시집을 보냈습니다.

시인이 여성인 때문인 모양인데, 직설·직시보다는 은유·비유가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에로틱'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김경의 두 번째 시집 <연애>의 표제작입니다.

"나는 슬픈 꽃의 살갗을 가진 탕아
편식주의자인 사내의 불길한 애인
애초 그대와 내가 바닥 없는 미궁이었을 때
얼마나 많은 바다가 우리의 밤을 핥고 갔는가

내 몸 어디에 앉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 미타산 저물 무렵처럼
나와 어떻게 이별할지 끙끙대는 어린 연애,
유리창처럼 닦아주고 싶은 저, 나이 어린 연애의 등

투정할 새도 없이 그는 가고
흰 배롱나무 꽃자리에 백악기의 새처럼 앉아
나를 살피는 연애

……

껍질까지 벗어 던져야 돌아오는 연애
生의 난간 같은 연애"('연애' 부분)

어떻게 읽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읽히는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사실 미타산이나 백악기 같은 표현은 전혀 소화가 안 됩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연애', '돌아오도록 내가 만드는 연애', '돌아와서는 탕아도 불길도 미궁도 모두 지우는 연애'.

'투정할 새도 없이 그는 가고', 그 뒷모습을 보면서 쓴 시가 이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풀코스로 외로웠군요

당신의 적막한 얼굴
제 풀에 지친
가부좌 튼 얼굴이군요
어느새 나를 닮아버린
내가 당신이었군요

당신은 날마다 날 벗어 던지려 합니다
지긋지긋하거나 적막강산이었던 얼굴
얼굴을 파먹던 탈이
날 보고 말하네요
당신은 외로운 껍질이군요
이미 내가 된 얼굴에게 나도 따라 답하네요

당신 또한
풀코스 외로웠던 나의 뒷모습이군요".('유감' 전문)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두가 시인에게는 관찰의 대상이고 투영의 대상이 돼 있습니다. 감정을 거기다 실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런 국면에서 김경의 시를 읽다 보니, 모텔 아모르는 서포 바다를 바라보는 갯가에 있을 것도 같습니다.

영화 '6년째 연애 중'에서.


먼저 '모텔, 아모르' 전문입니다.

"한두 시간 콩 타작 하듯

쉬었다가 갈 손님처럼 눈이 온다

'조용한 방 있어요?'
제법 깐깐한 손님 같은 눈이 온다

명마구리 환장하는 이른 봄날
지금 사랑인 사람들에게
아랫목 같은 봄 눈

사랑의 한쪽 끝에 묶여
간신이 연명하는 나도
눈 위에 눕는다

202호실 앞 쥐똥나무
움찔움찔 몸을 편다".

다음으로, '서포 바다' 전문입니다.

"뻘과 길 한 몸 되어
똬리를 틀고 누운 저 서포의 끝은
필경 어떤 꽃밭의 어귀일 것이다
바닷물에 휩쓸려 온 흰 목장갑 같은 섬들이
봉두난발 바다에 수다를 풀어놓는 서포

봉분 같은 해가
수평선 꼬리에 떨어진다
쉽사리 속을 보여주지 않는 바다에
별이 떴다 저 별들은
밤새도록
어떤 꽃의 대궁을 흔들어 댈 것인지
누군가의 절정을 불러모을 것인지"

시집 '연애' 표지.

책 말미에서 문학평론가 유성호의 해설 '사랑과 근원의 시학'은 이런 식으로 말해 놓고 있습니다.

"김경 시편은, 일차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충동을 의미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 본래의 위의랄까 존재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찰의 추구 과정이 격정적인 '사랑'의 시학을 통해, 매우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생성된다는 점에서 성과다."

그러나 제게는 '철학적 성찰' '형이상학적 충동' '인간 본래의 위의'랄까는 개뿔입니다. 아니 개뿔도 아닙니다. 그런 따위 없어도 세상은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따위는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좀 덜 숨긴 채(좀 더 홀딱 벗긴 채)로 내 놓으면 보통 독자들한테는 좀 더 좋겠다 싶은 대목도 없지는 않다는……. 한 번 말씀드렸지만, 녹지 않은 가시나 뼈다귀 같이 걸리적거리는 표현이 없으면 더 좋겠다는.

사랑은 아무래도 날것이고 붉은 색일 텐데, <연애>의 시인은 아직 자기 사랑에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세상이 씌워 놓은 부끄러움을 깨끗이 떨치지는 못해, 여러 잡스러운 색깔로 덧칠을 해 놓은 구석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텔 아모르'는 그런 면에서 좀 아쉽고요, '서포 바다'는 그런 가운데 돌파할 개연성을 보여줘 고맙습니다.

곁가지로 덧붙이는 말이지만, 아마도, 이 여성시인은 모텔에 남자랑 같이 간 적이 없습니다.(아니면 내숭이 10단을 넘든지요.) 어떤 미친 남자가 모텔에 여자 달고 들어가면서 "'조용한' 방 있어요?" 이렇게 묻겠습니까? 그냥 조그만 창문을 열기만 해도 되는데요. 하하.

불교 문예. 110쪽.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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