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열 일곱 학생까지 학살, 의혹이 사실로…

기록하는 사람 2009. 12. 2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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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이 중·고생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학살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2001년 이같은 의혹을 <경남도민일보>를 통해 제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식 확인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위원장 이영조)가 최근 유족들에게 통보한 '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밝혀졌습니다.

☞관련 글 : 집단학살 진실규명 결정을 보는 특별한 감회

진실위 결정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초순경 마산중학교 4학년생이던 당시 창원군 내서읍 감천리 송규섭(17·호적상으로는 1934년생) 군이 학교 교문 앞에서 해군방첩대 요원에게 연행되었으며, 이후 행방불명된 사실과 참고인들의 진술로 보아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1949년 제적생 122명에 대한 마산여중 학적부. 이들중 상당수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희생된 송규섭의 동생 수섭(63) 씨는 저와 전화통화에서 "당시 마산중학교는 6년제여서 지금으로 보면 고등학교 1학년에 불과하던 형이 어떤 잘못을 했길래 재판도 없이 학살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 2001년 6월 <경남도민일보>는 당시 마산지역 중·고등학생에서 시국사건으로 중퇴한 300여 명이 보도연맹에 가입됐으며, 그 중 일부는 학살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당시 보도에서 마산상고 학생으로 미술부원이었던 오빠(19)가 보도연맹에 가입돼 학살됐다고 증언한 팽상림 전 성호초교 교사의 호소를 전했었죠.(그러나 당시 65세였던 팽상림 할머니는 지금 저와 연락이 단절되었습니다. 혹시 돌아가신 게 아닌지 걱정이네요.)

"나라가 보호하고 잘 지도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또 믿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이 목숨까지 빼앗겨야 하는 큰 죄였던가. 귀중한 인권은 유린되고 무참히 희생된 원혼은 지금도 구천을 떠돈다. 마산상업학교 미술부 학생이던 오빠(19)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 세상이 흉흉해진 줄도 모르고 당시 학생동맹에서 부탁해온 포스터를 그려줬다. 아! 그것이 큰 빌미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중략)

보도연맹 소집날. 배를 앓는 오빠에게 "참고 어서 갔다오너라. 열성을 보이면 빨리 취직이 되거나 공군입대도 가능해 질런지…"하는 아버지의 재촉을 뒤로 하며 큰오빠가 손수 지어 만든 파란색 하복(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99년 팽상림 할머니가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한 호소문 중 일부)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전인 1949년 12월 28일자 <남조선민보>에 보도된 기사를 근거로 당시 보도연맹 마산지부가 마산상고와 마산중·마산여중 교감 이상과 연석회의를 갖고, 이들 3개 학교 학생 중 보안법 위반으로 중퇴한 300여명 전부를 보도연맹에 가맹시키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시국사건으로 제적된 한 여중생의 학적부. 빨간 글씨로 "교내 불온세포조직하려다 경찰에 구금"이라고 적힌 제적사유가 보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노치수 회장은 "당시 군경에 희생된 보도연맹원이 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억울한 희생자였지만, 특히 열 일곱 살 학생이 사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사상범으로 몰아 죽였겠느냐"면서 "이런 사례만 보더라도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비인도적이며 반인륜적인 범죄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진실위는 이번 사건에 대한 결정서에서 △국가의 공식사과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위령제 봉행 및 위령비 건립 등 추모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국가와 지자체의 공공기록물과 '시사' '군지' 등 역사책에 사건내용 수록 △군인과 경찰, 공무원 및 초·중·고 및 대학생 대상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을 권고했습니다.

※이 글은 오늘(12월 28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글을 고치고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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