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저 추운 겨울 나무에 어린, 화사한 봄날

김훤주 2009. 12. 2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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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곶자왈 작은학교 아우름지기인 문용포가 쓴 책 <곶자왈 아이들과 머털도사>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후배이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한 때 노동운동을 함께한 사람입니다.

그런 문용포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 짐승도 자기를 겁내거나 두려워해서 피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과 가까워져서 아이들 그리고 동네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용포가 아이들과 어울려 사는 모습을 담은 책이 <곶자왈 아이들과 머털도사>인데, 170쪽 제목이 '겨울 나무의 희망, 겨울눈'입니다. 겨울나무나 겨울숲을 쓸쓸 또는 스산으로 여기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더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는데, 나무들은 거꾸로 잎과 열매를 다 떼어낸 채 맨 몸으로 겨울나기를 하는 모습이 의연해 보이더구나. 그렇다고 나무들이 겨울에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야."

"줄기나 가지를 잘 살펴보면. 날렵한 어린 가지와 구불구불 늙은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작은 눈이 달려 있단다. 겨울에 볼 수 있어서 겨울눈이라고 하는데, 저 작은 눈들이 봄이 오면 잎이 되고 꽃이 되어 나무를 더 크게 자라게 하지."

"겨울눈은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야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미 여름과 가을에 잎이 떨어진 자리나 줄기 끝에 생겨난단다.나무마다 꽃과 잎이 다른 것처럼 겨울눈도 그 크기나 생김새가 저마다 다르단다. 씨앗 한 알에 나무의 미래가 담겨 있듯이 겨울눈에는 이듬해 봄과 여름의 모습이 담겨 있지."

"보통 가지 끝에 있는 눈(잎눈)은 싹을 틔우고, 둥글고 솜털이 더 많은 눈(꽃눈)은 꽃을 피운단다. 물론 두 개의 눈을 함께 갖춘 겨울눈도 있어."

겨울나무에는 겨울눈이 있는데, 이것이 겨울에 만들어지는 대신 여름과 가을에 이미 만들어져 있다가 겨울이 돼서 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겨울눈에는 꽃과 잎이 들어 있는데 따라서 이듬해 봄과 여름의 모습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겨울에서 봄과 여름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주는 얘기입니다. 진짜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름이 지면서 곧바로 다음 여름이 준비되는데, 그 준비된 여름이 겨울을 지나지 않으면 여름이 될 수 없다는 이런 관계가 말입니다.

이어서 174쪽에는 겪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무슨 초등학교 학생이 썼겠지요. 이렇습니다.

"우리는 나무의 겨울눈을 만나러 숲에 갔다. 우리들은 추워서 파카랑 코트를 꼭꼭 껴 입었는데 저 조그만 겨울눈은 춥지도 않나? 겨울눈은 참 대단한 것 같다."

"만져 보니까 보송보송한 것도 있고 까칠까칠한 것도 있었다. 겨울눈을 생각하지 않고 숲에 갈 때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가 쓸쓸하다고 생각했는데, 겨울눈을 보려고 하니까 내 눈에는 겨울눈만 보였다. 나무 한 그루에도 엄청 많은 겨울눈이 달려 있었다. 겨울 숲이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겨울눈을 안다면 겨울나무가 겨울숲이 칙칙하게 멈춰 있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겨울눈을 알고 겨울숲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온통 달라보이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겨울숲에 들어가지 않고도 세상이 온통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다른 여느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샛길이 있습니다.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이지요.




그 샛길을 오늘 아침 지나가다가, 목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주 양지바른 데 서 있는, 샛길을 내면서 많은 나무를 잘라낼 때도 잘려 나가지 않고 살아남은 녀석입니다.

눈에 들어온 까닭은, 짐작하시는대로, 여기 매달린 저 무수한 겨울눈 덕분입니다. 아시는대로 목련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기 때문에,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죄다 꽃눈,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몸은 추워서 웅크리면서도 화사한 저 봄날의 목련 꽃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녀석이 온 몸에 꽃눈을 달고 있는데 이 꽃눈이 그냥 지금 모습대로 보이지 않더라는 얘기랍니다.

저토록 수도 없이 많이 맺혀 있는 꽃눈들.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스스로를 키워내고 있는 꽃눈들. 어쩌면 스스로를 키워내든 말든 그냥 견디고만 있는 꽃눈들. 바로 이런 꽃눈들 덕분에, 저는 오늘 겨울 한복판에서 꽃피는 봄날을 봤습니다.

김훤주

곶자왈 아이들과 머털도사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문용포와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 (소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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