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70년대 가을 느낌을 주는 삿갓배미논

김훤주 2009. 10. 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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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배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여 들어보셨나요. 저도 얼마 전에 이 말을 알게 됐는데, 삿갓처럼 생긴 논배미, 삿갓 만큼이나 조그만 논을 뜻한다고 합니다. 배미, 논배미는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하나하나 논을 말한다지요.

삿갓배미가 얼마나 작으냐 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 '탄생 설화'를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농사꾼이 산골 논에 일하러 갔답니다. 가서는 일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잠깐 삿갓을 벗어놓고 쉬었습니다.

그러면서 보는데, 어라? 참 이상한 노릇이군. 논이 한 배미가 적더랍니다. 원래 논배미가 넷이었는데, 지금 눈에 들어오기로는 셋뿐이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래 한참 헛고생하면서 헤아리다가, 벗어놓았던 삿갓을 무심코 들어보니 글쎄, 거기 잃어버린 논배미 하나가 들어 있더라는 것입지요. 하하.

이렇게 조그만 논을 이번에 봤습니다. 지금은 어지간히 높은 산골짜기도 경지 정리가 돼서 반듯합니다만, 여기 이것은 생긴 모양이 말 그대로 삿갓 꼴을 하고 있습니다. 골짜기 모양이 원래부터 네모 반듯하게는 생겨 먹지 않았나 봅니다. 옛날에는 먹을거리가 없어서 이런 데서까지 땅 파먹고 살았습니다.

저는 이 풍경이 정겹습니다. 사람 손길이 느껴져서요.

가을걷이를 하느라 베어 놓은 짚단도 모양이 새삼스럽습니다. 4~5년 전에만 해도 볏짚을 네모나게 논에다 높게 쌓아올리더니, 이제 다시 달라져서 논 대부분은 하얀 비닐 포대로 짚을 똘똘 말아 버립니다. 기계로 하니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짚단은 이렇게 하얀 포대로 똘똘 쌉니다.

그런데 여기 이 논은 기계가 들어오지 못하나 봅니다. 아니면 논 주인한테 여기 쓸 그런 기계가 없었거나요. 여기 나락을 베어 놓은 짚단은 제가 어릴 적에 하던 그대로입니다.

옛날엔 어른들 크게 한 움큼씩 나락을 모아 잡고는 익숙한 놀림으로 낫질을 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한 손아귀에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옆에 두고 나갑니다. 어린 눈에는 한 손아귀로 저만큼이나 많이 나락 포기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이 짚가리들은 나중에 같은 짚으로 밑둥을 묶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10월 둘째 월요일 합천 모산재 아래 갔다가 만났습니다. 논에 산으로 이어지는 비탈에는, 심은지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 싶은 감나무들이 여나문 그루 서 있습니다.

멀리 아래로 저수지가 보입니다. 위쪽에는 감나무가 있고요.


아마 단감 금(金)이 좋을 때 몇 그루 내려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없는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돈 좀 되려나 싶어서 말입니다. 지금은 감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일부러 따간 것 같은 자취도 없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비탈에는 억새가 건들 부는 바람에 휘감겨 있었고요, 산국·개미취 같은 풀꽃도 피어 있었습니다. 물론 저기에는 제가 알아보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이런저런 풀들도 많고, 그 또한 소중한 존재들이고요.

쑥부쟁이. 개미취인 것 같다고 적었더니 크리스탈님께서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


저 논이랑 저 감나무가 누군가에게는 먹고 살려고 땀흘리게 만드는 소중한 일터겠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가을 느낌 어쩌고 하는 타령이 좀 송구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게는 저것이 땀내나는 일감이 아니라 옛 기억이 묻어 나는 새삼스럽고 정겨운 풍경인 것을요.

노란 녀석은 산국. 이 또한 크리스탈님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당.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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