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사이비 기자와 사이비 시민운동가

기록하는 사람 2009. 10. 2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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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는 매주 목요일자 17면을 '미디어면'으로 제작하고 있다. 언론계 이슈나 화제, 소식을 전하는 지면이다. 나는 그 면의 담당데스크다.

지난주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일간지인 <경남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경남일보 100년, 창간 의미와 비전'이라는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신문이긴 하지만, 평소 사장이나 편집국장이 바뀌어도 기사화해오던 관행대로라면, 이 또한 기삿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토론회 자료집을 본 나는 기사화를 포기하고 말았다. 주제는 '의미와 비전'이었지만, '비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와 주필 장지연의 친일논란에 대한 자기합리화와 자화자찬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경남일보는 창간 100주년 기념호 사설에서도 초대 주필 장지연의 친일 혐의를 적극 옹호했다. 백보양보해 장지연의 행위가 친일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경남일보 자체의 친일이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경남일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개 '~주년' 또는 '기념'이라는 말이 붙는 행사들이 다 그렇다.


지난 16일과 18일은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토론회와 기념식, 음악회 등 여러 행사가 열렸지만 나는 한 군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도 30년 전 항쟁의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되살려낼 것인가 하는 고민보다는, 제대로 평가받고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평이 주를 이루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왕년(往年)'을 팔아먹고 사는 민주인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현실에서 핍박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왕년에 한가락 했으니 이젠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들이 찾는 곳은 애타게 구원을 손길을 내미는 소외된 삶의 현장이나 피가 튀는 투쟁의 현장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념식장의 단상이나 우아한 음악회, 발제료나 토론사례가 나오는 회의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59년 동안 국가권력의 감시와 핍박 속에 살아온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 16일 마산에서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모처럼 얻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기회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터라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고, 행사 내내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3·15민주의거나 부마민주항쟁, 6월민주항쟁 등 이른바 '민주단체'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STX라는 자본권력과 마산시의 개발행정에 밀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마산 수정만 주민들의 농성현장에서도 그들 단체의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기자 중에도 '사이비기자'가 있듯이 민주인사인 척 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이비'들이 있다고 본다. 그들을 감별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지금 그들이 밥벌어 먹고 있는 자리에서 정말 정의롭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교수라면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시민운동가라면 예산지원을 받기 위해 행정권력이나 기업에 머리를 조아리진 않는지, 기자나 PD라면 자기가 속한 매체의 공정보도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자신의 밥줄이 걸려 있는 자리에서는 불의에 침묵하거나 온갖 편법을 동원하면서, 자기가 손해볼 일 없는 일에만 가장 정의로운 듯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사이비'로 보면 된다.


'부마항쟁이 잊혀지고 있다'는 데 방향을 맞춘 지역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언론 역시 '계승'보다는 '기억'과 '기념'에만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 '계승'이 빠진 '기념'은 항쟁을 박제화시킨다. 박제화한 항쟁보다는 차라리 잊혀지는 게 낫다.

※관련 글 : 장지연 친일명단 제외? 착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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