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여자 다리 있는 곳, 남자 바지 있는 곳

김훤주 2009. 9. 28. 07:33
반응형

8월 10일 열린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회에서, 7월 10일자 4면에 나간 기사 제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요지는 "'MB악법 철회, 정리해고 철회, 4대강 사업 중단, 대북 대결정책 중단'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인데, 제목을 너무 가볍게 달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가볍게 단' 제목은, "장바구니 날로 가벼워져 - 경남 지역 여성 333명 시국 성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장바구니 날로 가벼워져'라는 표현은 "이들이 한 발언 중의 한 대목일 뿐이고, 전체를 봤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여성 이미지'에 끼워 맞춘 제목이라는 말씀이었지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꼬집음이다 싶었고, 다음부터 더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튿날 해당 신문을 찾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봤습니다. "한나라당 이명박 집권 이후 장바구니는 날로 가벼워지고 있고, 일자리도 불안해져 해고 칼날이 우리 가족, 여성을 겨누고 있다. 거짓 서민정책을 중단하고 4대 강 살리기 삽질에 들어가는 돈을 서민 살리는 데 쏟아라." 기사에는, 열 명남짓 되는 여성들이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손팻말을 든 채 기자회견을 하는 사진이 물려 있었습니다.

여성 333인 시국선언. 경남도민일보 사진.

사진을 보고 있는데, 이렇게 여성만으로 또는 여성이 다수를 이루는 장면이 사실은 참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먼저 시국선언을 기획한 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입니다. 그이들은, 4대강 살리기를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내고 눈길도 마찬가지 끌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결국은 비판을 받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특징있게 제목을 뽑으려 한 편집 기자의 애씀도 느껴졌습니다. 제가 보기에 시국선언을 기획한 이와 편집 기자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성''만'의 시국선언이라는 희소성에 착안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앞서 7월 24일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다가 하이힐 신은 여자 다리들을 뒤쪽에서 찍어 놓은 사진이 눈에 띈 적이 있기 때문에 더 들었지 싶습니다. 제목이 각선미 어쩌고 하는 사람 다리가 여럿 들어 있었습니다. 무슨 미인대회였습지요.

함께 물려 있는 사진을 몇 장 넘겼더니 심사위원들 사진도 나왔습니다. 뒷모습 사진이라 정확히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심사위원은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뉴시스 사진.


현실이 이렇습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여·야를 떠나, 진보·보수를 떠나, 행정기관이냐 아니냐 또는 시민사회단체냐 아니냐도 떠나, 여성이 전부 또는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미디어판도 마찬가지여서 이를테면 전국언론노동조합의 경우 지난해 대의원이 200명 남짓 될 때 여성 대의원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18일 경상대학교 남명학관에서 치러진 학술대회 '선비 정신과 공직자의 윤리'도 똑같았습니다. 오후 한 시부터 주제 발표가 이어지다가 다섯 시 즈음 종합 토론이 시작됐습니다. 발제자와 토론자 아홉 사람이 단상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그런데,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책상 아래 모습은 죄다 남자 신발과 바지뿐이었습니다.

대부분 힘을 형성하는 자리나 힘을 행사하는 자리에서는 남성이 전부 또는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물론, 힘을 형성하거나 행사하는 자리에서 여성이 다수거나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자리가 '마이너minor들의 리그'일 때 그렇습니다. 농민회가 아닌 여성농민회, 총학생회가 아닌 총여학생회, 새마을지도자회가 아닌 새마을여성지도자회, 경제인연합이 아닌 여성경제인연합…….

이것 말고도 여성이 다수인 자리는 이를테면 미인대회 같은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미인으로 뽑히면 그 또한 나름대로 힘이 되고 권력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미인은 (남자들이) 힘을 행사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본질적 규정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학술대회처럼, 담론을 형성하는 자리에서도 여자는 없거나 조금뿐입니다.

7월 10일자에서 제목이 '너무 가볍게' 달린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런 현실도 해당될 것입니다. 여성들이 주체로 나섰다는 사실을 색다르게 보게 하는 현실, 여성들이란 원래 '장바구니' '따위'에나 신경쓰는 존재라는 식으로 여기게 하는 현실이 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기울어져 있는 현실을 반듯하게 고치지 못하는 이상, 이런 제목 잘못 달기는 아마 되풀이될 개연성이 높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