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현대판 공적비와 다름없는 문화재안내판

기록하는 사람 2009. 9. 2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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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안에 있는 천마총 앞에 가면 '천마총 사적비'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정권 시절인 1976년 10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세운 것인데, 그 내용이 숫제 '박정희 공적비' 또는 '송덕비'에 가깝더군요.

비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관련 글 : 경주에서 발견한 박정희 송덕비)

"이곳은 국토통일의 기상이 넘치고 민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신라의 천년고도 서라벌의 옛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지구 개발의
대영단을 내리셨다.
(...중략...)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전 한국의 위대한 기상 속에 재현코져 하는 그 드높은 뜻을 여기 새겨서 기리 전하고져 한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이지만, 그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임시절에 이뤄졌던 모든 정책이나 사업이 그의 '대영단'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인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박정희가 다른 누구의 조언이나 건의, 자문도 얻지 않고 오로지 혼자 결단을 내려 지시함으로 이뤄진 것이라 하더라도, 저런 식의 글을 돌에 새겨 남기는 것은 중국의 모택동(마오저뚱)과 강택민(장쩌민), 북한의 김일성 또는 김정일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어제 모처럼 아내와 함께 마산 팔용산 봉암수원지 둘레길 산책을 하던 중 '천마총 사적비'보다는 덜하지만 그것과 별반 다름없는 마산시의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황철곤 마산시장'의 이름과 그의 업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2005년 7월 민선(3,4,5대) 황철곤 시장이 문화재청에 문화재(등록문화재 제199호)로 등록하였고, 2009년 2월 수원지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이용한 자연 친화적인 탐방로와 휴게시설 확충으로 시민들의 중요한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등록문화재란 근대유산 중에서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재청이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내판의 글을 보면 등록문화재가 된 것이 마치 황철곤 시장의 업적처럼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탐방로와 휴게시설 확충도 황철곤 시장이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든 돈은 모두 우리 시민이 세금으로 낸 것이고,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도 우리 시민들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것도 그의 업적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현직 마산시장의 명의로 안내판을 세우면서 본문 안에 자기 이름을 주어로 하여 업적을 서술하는 것은 마치 자기 공적비를 자기가 세운 듯이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차라리 앞의 '박정희 공적비'는 비석을 세운 주체가 '문화재관리국'이어서 아랫사람이 아부하기 위해 세웠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인 시장의 이름을 삭제하고 다시 세운 마산수원지 표지석.


더욱이 이곳 봉암수원지는 몇년 전 마산시가 경남대박물관에 용역을 주어 표지석을 세우면서 수원지를 건설한 당시의 일본인 시장 혼다 쓰치고로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논란을 빚은 바 있는 곳입니다. 2005년 마산시는 시민단체의 그런 지적을 받아들여 자칫 일본인 시장의 공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삭제한 표지석을 다시 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때의 마산시장도 황철곤이었죠.

그럼에도 다시 자기 명의의 안내판을 세우면서 자기 이름과 업적을 새겨넣은 것은 시민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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