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문화유산을 왜 특정단체에 무상임대하나

기록하는 사람 2009. 9. 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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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에는 83년 전인 1926년 일제가 지은 일본 헌병분견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인 1909년 12월부터 일제 헌병은 마산에 있었으나 분견대 건물이 지어진 것이 1926년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1945년 해방 때까지 20여 년간 헌병대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에서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당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 헌병대 건물은 국방부 소유가 되어 군 정보기관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이 바뀐 옛 보안사의 마산파견대가 '해양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각종 사찰활동을 해왔겠죠.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헌병대가 해방 후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을 사찰하고 고문하는 정보기관으로 탈바꿈 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사찰 사실을 폭로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 후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이렇게 시내에 나와 있던 정보요원들을 군 내부로 철수시켰습니다.

기무사 출신 퇴역군인들의 친목단체인 충호회 사무실로 사용되던 당시의 마산 헌병분견대 건물. @문화재청


그러나 이 건물은 정보요원들이 철수한 뒤에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기무사 출신 퇴역 군인들의 친목단체인 '충호회 경남지부'와 보훈자녀 단체가 이 건물을 사용해왔던 것입니다. 여전히 소유권과 관리권은 국방부가 갖고 있었지만, 친목단체에 불과한 충호회에 건물 사용권을 준 것은 지금도 납득이 되지 않은 일입니다.

어쨌든 이 건물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들어 문화재청이 이 건물을 등록문화재 198호로 지정하면서부터였습니다. 문화재청은 이후 관리권을 국방부로부터 넘겨받아 보다 체계적이고 의미있는 활용을 추진해왔습니다.

엊그제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길에 보니 이 건물에 있던 '충호회'는 나가고 비어있더군요. 생각난 김에 법원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봤더니 지난 7월24일 관리권이 국방부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되었고, 8월 11일자로 등기명의인 변경까지 마쳤더군요.


너무나 반가운 일이어서 문화재청에 전화를 해봤습니다. 어떤 용도로 활용할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저를 포함한 지역의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 건물이 '근·현대 역사기록관(아카이브)'로 활용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문화재를 문화적 용도로 활용하자는 취지에도 맞고, 시민을 감시, 통제, 탄압하던 장소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받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충격과 실망이었습니다. 마산시에서 활용방안에 대한 의견서가 올라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시 몇몇 보훈단체에 무상임대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산시에 다시 확인해보니 과연 그렇게 의견서를 올렸다더군요. 5개 보훈단체들의 요구가 있었고, 갤러리나 전시관, 미술관, 도서관 용도도 검토해봤지만 적당하지 않아 그렇게 활용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시민 여론수렴은 해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그런 단체의 민원과 유관단체에 자문을 해본 것이 전부였다고 하더군요. 83년만에야 비로소 시민의 품으로 돌려받게 된 일제 헌병대 건물이 또다시 몇몇 보훈단체에 독점될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도 '무상'으로 말입니다.

마산시는 그런 단체에 임대해주지 않고 다른 용도로 쓰면 별도의 관리 및 운영인력과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역사기록관으로 활용한다면 대학이나 유관단체에 위탁운영을 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 되면 시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 됩니다.


알다시피 기록문화를 중시하는 웬만한 국가에는 도서관(library)이나 박물관(museum)의 숫자만큼 기록관(archives)이 많습니다. 도서관이 인쇄된 책을 보관하고, 박물관이 유물을 보존하는 곳이라면, 기록관은 말 그대로 문서를 비롯한 각종 역사자료를 보존하는 곳입이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도 '당안관(當案館)'이라 불리는 기록관이 성(省)에서 현(縣)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각 지역마다 특성을 살린 민간기록관도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노무현 정부 때 개정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는 전국의 모든 시·군에 '기록관'을 설립하도록 돼 있고, 광역단체에는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시·군 기록관은 임의규정이라 자치단체장들이 굳이 예산을 써서 설립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재 건물을 민간기록물 보존·관리공간으로 활용하여, 뜻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민간기록물 관리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수집·평가·보존·활용토록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다들 바다를 메워 공장을 짓고 산을 깎아 길을 내는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당장 멸실돼 가는 역사기록물을 보존하는 데 관심을 갖는 단체장은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등록문화재를 문화적 용도로 써야 한다는 시민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입니다. 83년만에 되찾은 일제 헌병대 건물이 또다시 몇몇 단체의 독점적 소유물이 되어선 안됩니다. 누리꾼 여러분 힘 좀 보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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