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복면만 보도됐지 실상은 외면당했다

김훤주 2008. 4. 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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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은 서울의 눈요깃거리일 뿐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신문과 방송들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눈요깃거리로나 여기지 얼마나 중요한지는 별로 따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서울 또는 수도권에 사는 해당 매체 소비자들에게 “어, 이런 일도 있었어?” 하는 느낌만 주도록 말입니다.

심각하고 본질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단지 수도권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이나 방송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별나거나 이상한 모습에만 눈길을 꽂아두고 머무는 일이 있습니다.

보기를 들겠습니다. 지금도 기억하시는 이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텐데, 2006년 11월 전국적으로 사람들 눈길을 끌었던 경남 밀양시 단장면 감물리 ‘시골 마을 어르신 복면 쓴 사연’입니다.

밀양 감물리 주민 다섯 경찰에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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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일흔을 훌쩍 넘긴 여성 어르신이다.

산골짜기 다랑논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물리에서 샘물 공장을 짓지 못하도록 일흔도 넘은 어르신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을 벌이는데 모두 복면을 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밀양경찰서에 11월 23일 감물리 주민 다섯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됐는데 모두 마을에서 젊은 축인 40대였습니다. 감물리는 사는 사람이 300명 안 됩니다. 여기서 다섯이나 구속됐다니 <경남도민일보>는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졌나 싶어 바로 취재했습니다.

취재 결과는 황당 자체였습니다. 젊은 주민들은 시청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산골 마을에서는 일흔이나 여든 어르신들이 그야말로 노동조합 파업 현장에나 있음직한, '까만 복면'을 하고 나무막대까지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복면 뒤집어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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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밖에서 복면 쓰고 막대 들고 지키고 있다.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복면을 하도록 만든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해 9월 6일 아침, 이른바 '용역' 마흔 가량이 70대 여성 어르신 셋이 망을 보던 공사 현장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어르신은 보기 좋게 패대기쳐졌습니다.

집에서 주민들이 달려 나오는 모습은 용역들의 비디오와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샘물공장은 이를 근거로 주민 13명을 고소.진정했고 이 가운데 5명이 구속됐습니다. 이때부터, 용역들한테 찍히지 않으려고 복면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샘물 공장 설립 시도는 훨씬 앞선 2003년 시작이 됐습니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2003년 5월 (주)밀양얼음골샘물이 창업 신청을 하고 단장면사무소는 거짓으로 가득 찬 의견서 공문을 냈으며 밀양시는 이를 바탕삼아 20일만에 아주 빨리 허가를 내줬습니다.

2003년 7월에는 공장을 지으려고 마을 어귀에 관정을 파고 닷새 정도 시험 삼아 물을 뺐을 뿐인데도 농업용 관정 지하수 수위가 80미터 가량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올해로 5년째 접어드는 힘든 나날의 시작이었습니다.

샘물 공장 때문에 공동체까지 깨지고

299명밖에 안 되는 감물리 주민 가운데 2006년 11월 현재 37명(구속 5명 포함)이 업무 방해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80명가량에게는 "당신들 때문에 60억 원 손실을 입었으니 배상소송을 법원에 내겠다."는 내용증명이 배달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20명은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와 함께 논밭 가압류도 당했습니다.

주민 3분의1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자, 당연히 계속 싸워야 한다는 이와 그만두자는 사람 사이 분란이 생겼습니다. 샘물공장의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작용이 있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달 전인 10월에는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갔을 마을 사람들끼리 다툼이 빌미가 돼 3명이 구속되기도 했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을 공동체’가 완전 깨진 것입니다. 아무리 다퉜어도 다음날 아침 화해하는 이웃이었지만, 이제는 조그만 싸움에도 진단서까지 끊어 고소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귀처럼 구는 원수가 됐다는 뜻입니다.

감물리 사연 가운데 한 자락이 11월 27일(월) 우리 <경남도민일보>에 복면 차림 사진과 함께 나갔습니다. 이튿날인 28일은 물론이고 29일과 30일과 12월 1일과 12월 4일 지나서까지 이어서 나갔습니다.(저희도 한계(또는 잘못)가 있었습니다. 2003년 5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제대로 못 챙겼고, 앞서가는 보도도 못했습니다.)

서울 매체들, 지역 사건 속사정은 취재 않는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과 방송들의 경남 주재 기자들은 27일 아침 보도를 보고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로써 그동안 당한 감물리 주민들의 억울함과 답답함이 많이 풀어지리라 여겼지만 곧바로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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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공장 들머리를 농기계로 막았다.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서울에 본사가 있는 매체에서 나온 기사들을 보면서 "믿을 것을 믿어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골 노인 복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샘물공장 반대”와 “주민 5명 구속”은 눈에 잘 띄지 않게 취급됐습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이나 방송의, 관성에 젖은 기자들은 “그 정도면 됐지, 더 이상 어쩌라고?”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복면만 잡아챘을 뿐이지 정작 중요한 실상인 마을 공동체 파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고소.진정과 소송 제기와 가압류 같은 공동체 파괴의 실상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샘물 공장이 감물리 마을에 미친 파괴적 영향도 마찬가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1보에 이어지는 속보도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이나 방송은 “어, 그런 일도 일어났어? 재미있네.”가 시작이고 또 끝입니다. “공동체 파괴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 “공동체 파괴는 서울 또는 수도권에서 일어났을 때나 보도가 돼.” 합니다. “다섯 명이나 구속됐는데” 하면, “다섯 구속이 서울 같은 데서 무슨 사건이나 돼?” 합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이나 방송을 일러 중앙 일간지 중앙 방송사라고도 하지 않고, 전국 일간지 전국 방송사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서울 일간지 서울 방송사라고 이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 인터넷 매체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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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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