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김 전 대통령 업적, 민주 평화말고 더 없나

김훤주 2009. 8. 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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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전 대통령 업적으로 꼽히는 것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이 업적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반독재 민주화와 평화, 통일, IMF 외환 위기 극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쪽 면만 본 것입니다. 굳이 성향으로 나누자면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 그리고 심지어 보수 성향 인사들은 이런 얘기만 해도 됩니다만,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여기에 갇히면 안 됩니다.

김 전 대통령 업적을 이렇게만 꼽을 경우 우리는 이런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독재 민주화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에 머물러 멈추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평화와 통일은, 겨레 모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대한민국 우리 사회 가난한 사람들 또는 사회 약자들과 이해관계가 바로 눈에 보일 정도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도권 또한 지배집단에게 있습니다.

2. 사회 복지 분야에서 나온 빼어난 업적

제가 보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업적은 사회 복지 분야에 있습니다. 그이는 사회 복지의 기본 개념을 돌이킬 수 없도록 바꿔 바로잡았습니다. 이런 업적은 이른바 사회 밑바닥을 이루는 민중들한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별로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1998년 이룩한 의료보험 통합도 커다란 성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2000년 실행된 건강보험 체계는 직장·지역·공무원·교직원으로 나뉘어 있던 의료보험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질병에 걸릴 개연성은 더높은 반면 소득 수준은 낮은 농어민이나 작은 공장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밤 사랑하는 후배랑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확인한 바이지만,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어느 누구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 복지 정책의 커다란 전환, 나아가 전복(顚覆)이었습니다.

3. 사회복지를 국가 의무로 삼은 김 전 대통령

평화.

대한민국 헌법은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전에 있던 법률은 생활보호법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국민에게 필요한 기초 생활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정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생활보호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활은 개개인의 책임으로 두고, 적응하지 못하고 처지는 사람에게 국가가 시혜(施惠)를 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나오는 국민은 법령에 따라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생활보호법에 나오는 국민은 그런 기초 생활을 누릴 권리가 없고 가난해지거나 장애인처럼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이등 국민'으로 국가의 "보호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쓰는 "수급권자(受給權者)"는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지만 생활보호법에서 쓰이는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는 그런 권리는 없이 '국가나 자치단체의 보호를 받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권리로서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서 베풂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전-그러니까 생활보호법 시행 시기에 사회 복지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가 아니었고 국민의 국가에 대한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일부 덜 떨어진 이등 국민에 대해 은혜로이 베푸는 국가의 혜택이었을 뿐입니다.

'사회복지가 국민에게 권리가 되고 국가에게는 의무가 되는', 그러니까 헌법 제10조를 현실에서 구현한 것이 바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생활보호법은 그러니까, 일부 국민을 열등한 존재로 차별하는 도구였습니다.

4. 자기 정책이 아니었어도 받았다

<한겨레>는 8월 24일치 14면에서 당시 상황을 일러주고 있습니다.(참 고마운 일이지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45개 단체들이 1998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추진 연대회의'를 끊임없이 도입을 요구해온 제도다. 그러나 당시 정부 부처들은 모두 제정을 반대했다."

반독재 민주화. 경남도민일보 사진.

"복지부조차 '절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99년 지방 순회 도중 울산에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방침을 밝힌 이른바 '울산 발언'은 이 제도 도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순전히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과 국가의 지위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보도가 이를 말해 줍니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법 도입으로, 97년 이전 37만명이던 생계비 지급 대상자는 2001년 155만명으로 4배 이상으로 확대됐고 지급액도 월평균 13만8000원에서 20만4000원으로 늘었다." 한 번 권리를 누려본 사람은 손쉽게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를 옛날로 물리지는 못합니다.

5. 왜 이런 얘기를 하는 이는 눈에 띄지 않을까

저는 김 전 대통령이 사회복지 부문에서 이룩한 공로를 높이 치고 적극 알려나가는 일이 우리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도움을 준다고 봅니다. 그런데 평소 복지를 중요한 가치로 꼽아온 진보 진영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 까닭은 제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 경남본부가 18일 낸 애도 성명에도 이런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에 맞선 반독재민주화 투쟁과 대통령 당선 뒤 평화적 남북관계 진전을 이룬 공로"와 "서거 직전 현 정권에 보냈던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일갈"만 꼽았습니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대동소이(大同小異) 또는 오십보백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지배집단은 복지 확대를 꺼립니다. 그들이 대변하는 대한민국 0.1% 부자들에게 해로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 전 대통령 주요 업적으로 '사회복지의 가치 정립'을 꼽을 리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절차상 민주주의도 버거운데 무슨 복지야, 이럽니다.

민주당은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에서 멈춥니다. 자기네 명분을 살리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이들도 사회복지를 김 전 대통령 업적으로 꼽을 수는 있겠지만 더욱 발전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담이 아닙니다. 그이들 태생이 사회 약자 가난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하나 입에 올리는 데도 세력과 집단 또는 개인의 처지와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나 봅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같은 진보 진영의 무심함이 안타깝게 돋보이는 국면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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