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경상도 40대 남자의 김대중에 대한 기억

기록하는 사람 2009. 8. 23. 20:36
반응형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아마도 한국의 40대 이상 국민 중 '김대중 = 빨갱이'라는 세뇌공작에서 자유로웠던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그가 떠난 지금, 나도 내 기억 속 '김대중의 시대'를 기록으로 정리해두고 싶어졌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희한하게도 나는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대중이 유력한 후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담벽에 붙은 선거포스터를 보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빨갱이 나라가 된다카데?"

"그라모 큰일이네? 우린 이제 죽었다."

'빨갱이 김대중'이 대통령 될까 두려웠던 시절

그 후 선거일까지 계속 악몽을 꾸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괴뢰군'을 이끌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숨었다.

마침내 선거일이 됐다. 정말 불안했다. 투표를 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붙들고 물었다.

"아부지.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우짭니까? 그 사람 공산당이라 카던데."

"걱정마라. 투표장에서 보니까 대중이 찍는 사람은 전부 찾아내서 다시 찍으라고 하더라. 그 사람은 안될끼다."

과연 그는 떨어졌다. 나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후 중학생일 때였던가? 겨울밤 가족끼리 안방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얘기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아마 그에 대한 나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그러자 옆에서 모시를 삼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지." 그때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벌써 누군가가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또 악몽에 시달렸다. 경찰이 우릴 잡으러 오는 꿈이었고, 그때마다 마루 밑에 숨어 공포를 달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부산 서대신동에 있었는데, 남포동과 광복동에서 대학생 형님 누나들이 엄청나게 모여 데모를 벌인다고 했다. 특히 여대생 누나들이 치마폭에 돌멩이를 담아 나르는데, 거기 가면 대학생 누나들의 '빤스'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친구 몇 몇이 어울려 남포동에 구경을 나가기도 했다. '빤스'는 보지 못했지만, 보수동 파출소가 불탄 광경을 봤다. 뭔지는 모르지만 통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 무렵,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발에 부상을 입고 진주 한일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 문병을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가던 중 진주 입구 개양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총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내 뒷자리쯤에 앉아 있던 한 대학생 형님이 군인에게 멱살을 잡힌 채 개처럼 끌려 내려가는 모습을 봤다.

곧이어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북한에서 밀고내려올지 모른다는 불안섞인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나는 한 해 재수를 한 뒤 대학에 진학했고, 2학년을 마치고 85년 군에 입대했다. 통신대에서 비문운용병이 되었던 나는 음어 한 장을 분실한 혐의로 용의자 10명과 함께 보안대에 끌려가 만 30일 동안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독재정권 치하의 군대가 얼마나 폭력적이며 단순 무식한지를 육체적으로 정말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 땐 전두환 시대였고, 87년 6월 제대와 함께 예비군복을 입은 상태로 서울과 진주에서 6월항쟁의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내가 이른바 '운동권' 의식에 눈뜨게 된 것은 순전히 군대의 영향이 컸다. 전두환 시대의 군대는 정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신좌경 세력'과 '유로코뮤니즘',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교육을 수시로 시켰는데, 담당 장교와 하사관이 나에게 교안 제작을 대리토록 했고, 심지어 부대원에 대한 교육도 나에게 시켰다. 그런 과정이 오히려 나에게 그런 사상을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이제서야 털어놓는 '노태우 선거벽보 훼손' 범죄

어쨌든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6월항쟁이 마무리되고, 7·8·9노동자대투쟁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고향 남해에서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며 이듬해의 복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던 들녘이었다. 아버지와 나도 연신 이마와 목에서 흐르는 땀을 훔치며 논에서 벼베기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읍내에서 이어진 3차선 도로에 전경대원들을 가득 태운 트럭과 버스 3~4대가 몰려왔다. 도로변에 차가 열을 지어 멈추더니 운동복 차림의 전경대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적어도 100여 명은 넘어보이는 그 전경대원들은 간부의 일사불란한 지시에 따라 추수가 한창이던 들녘에 흩어져 농부들의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나 1시간 쯤이 지났을까? 언제 준비했는지 출력이 상당히 높은 스피커를 통해 온 들녘에 다 들릴만큼 큰 소리로 농부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농민 여러분, 바쁜 농사철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XXX 국회의원께서 직접 들판에 나오셨습니다. 새참도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고, 각종 경품도 넉넉하게 있으니 잠시 일을 멈추시고 여기 ○○○ 씨네 논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웃기는 짓이었다. 대통령선거철에 전투경찰을 들판에 풀어 일손돕기를 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걸 이용해 민정당 국회의원이 생색을 내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가 하면 경품까지 나눠주는 행위는 막 군대를 제대한 내 눈으로 봐도 선거법 위반 소지가 농후했다.

87년 당시 선거벽보. 출처 : 개갈 안나는 블로그 http://blacktv.tistory.com/

그러나 당시의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리 끝에 순진하게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게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아래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이런 짓은 오히려 당신을 욕먹이는 일이니 못하게 해달라.'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참 황당한 기억이다.

그 후 며칠 뒤 우리 동네의 민정당 유사(마을조직책)를 맡고 있던 집안 형뻘 되는 분 집에서 그냥 아무 명목도 없는 마을잔치가 열렸다. 돼지를 잡고 각종 안주와 술, 밥을 동네사람 모두에게 대접했다.

그 비용이 어디에서 나왔을지는 뻔했지만 동네에서 누구도 그걸 문제삼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이장이 마을회관의 스피커로 참석을 독려하기도 했다. 나도 거기 가서 막걸리를 얻어먹던 도중 마을 이장에게서 핀잔을 받았다.


"주완이 너. 김대중 운동한다며?"

당황했던 나는 "왜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며 이장에게 따졌다. 결국 이장이 얼렁뚱땅 그 말을 취소하는 것쯤으로 작은 소동은 마무리됐다.(사실 나는 그 이전에 평민당 면조직책이라는 분을 만나 지지입장을 말해준 바 있었다.)

어쨌든 이장에게 강하게 항의함으로써 어느정도 알리바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나는 작은 '범죄' 하나를 저질렀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선거포스터는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데, 그 아이가 노태우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실었다. 누가 그런 포스터 콘셉트를 잡았는지 정말 탁월했다. 하지만 나는 그 탁월한 선거포스터가 정말 거슬렸다.

그래서 어느날 한밤중에 기어이 거사를 감행했다. 동네의 한 담벽에 붙어있던 그 포스터에 사인펜을 갖고 가 여자아이의 머리 위에 만화처럼 말풍선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일부러 필체 감정을 우려해 왼손으로 평소 내 필체와는 전혀 다르게 썼다. 그 말풍선에 써넣었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아저씨는 광주에서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다음날 동네 분위기가 흉흉했다. 경찰에 신고가 됐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정말 그 때 나는 엄청난 불안에 떨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 후회를 했다. 여러번 경찰이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악몽을 꾸었던 것도 같다.

일부러 나는 무관심한 척 했다.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그 사건은 흐지부지됐고, 며칠 뒤 노태우가 당선됐다.

물론 나는 김대중을 찍었는데,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신문기자가 되어 선관위가 발행한 당시의 대통령선거 투표구별 개표결과 표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내가 투표했던 투표구에서 김대중 표는 10여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10여 명이라면 내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대충 누구 누구인지를 짐작할만한 숫자였던 것이다. (그 때 우리 집만 해도 최소 10명 중 2표였다. 나와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당시 진주교대 재학생이었는데, 선거일 평민당 투개표 참관인으로 고향에 왔었다.) 

물론 김영삼 표는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나왔고, 노태우 표는 또 김영삼보다 많이 나왔다.

97년 당선, 숨죽여 외쳤던 환호

그 후 나는 대학에 복학하여 약간의 운동권 물을 먹었고, 총선 때 민중의 당 후보로 나온 김두관 선거운동을 내 나름대로 돕기도 했다.

3당 야합으로 인해 김영삼에게 또 물을 먹은 김대중은 97년에 가서야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때 나는 신문기자가 되어 있었고, 경남도청과 도의회 2진 출입기자였다. 도청 기자실에서도 김대중 지지자라는 게 드러나면 시선이 곱지 않을 분위기였다. 다만 방송사의 한 젊은 기자가 호남출신이었는데, 그와 은밀히 김대중 당선을 기원하곤 했다.

그 즈음 아버지와 어머니도 김대중 지지자가 됐다. 아버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순전히 아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라는 이유 말고는 다른 게 없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투표일 어머니에게 전화로 누굴 찍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대중이 찍었다"고 대답했다. 놀라워서 "왜 (그 사람을) 찍었어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몰라, 빚(농가부채)이라도 좀 갚아줄까 싶어서 찍었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아마 창원시청 대회의실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밤새 개표 상황을 취재했는데, 방송사의 그 젊은 기자도 함께였다. 마침내 김대중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그 젊은 기자와 나는 슬그머니 개표장 밖으로 나와 복도의 화장실 입구 쯤에서 낮은 목소리로 "아싸!"를 외치며 얼싸안았다. 내 눈이 뜨거워졌다. 그 젊은 기자도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후 나는 진보정당 지지자가 되었고, 김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의 재임기간에는 이른바 '동진정책'과 '제2건국위원회'를 여러번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경상도에 있는 지역신문 기자의 눈에는 그의 그런 정책이 영락없는 '영남 기득권세력 포섭전략'이었고, '토호 끌어안기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이 모셔진 김해 진영읍 봉화산 정토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정이 함께 놓여져 조문객들을 맞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어쨌든 그의 '동진정책'과 '제2건국위'는 실패했고, 내 주장은 맞았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서도 토호 척결을 통한 지역민주화가 전제되지 않은 지방분권의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노무현도, 김대중도 떠나버린 지금, 그들의 그런 순진함조차 그립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