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명박 대통령이 보고 배운 것 같은 책

김훤주 2009. 7. 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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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조선 정조가 숨지고 순조가 왕위에 오른 1801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를 주로 다릅니다. 글쓴이 이윤섭의 한국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책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개항(1876년) 이후 한국사는 완전히 세계사의 한 부분이 됐으나 한국 근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세계 정세에 대한 기술 없이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한국 근대사 기술은 조선 왕조의 '비자주성'을 은폐하거나 호도하고 있어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는 사실을 꼽았습니다.

◇19세기 조선을 지배한 서울 벌족 

나름대로 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한 이들은 19세기 세도 정치의 장본인들이 지역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착각을 합니다. 15세기 중앙 정치에 진출한 사림들의 명맥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은연 중에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안동 권씨나 안동 김씨가 서울이 아닌 안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식이랍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19세기 들어 서울에 근거를 둔 벌족이 중앙의 정치권력을 장악했는데 이는 이들 가문 출신이 비변사 당상관의 3분의2 정도를 차지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의 비중이 농업에서 상업을 바탕으로 한 유통경제로 옮겨가고 서울이 그 중심지로 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이런 착각은, 당시 핵심 지배 집단이었던 이들 벌족의 후손들이 은근히 조장한 측면이 있지는 않을까요? 지배 족벌은 "노론으로 분류될 수 있으나 이미 붕당의 범주를 넘었"기 때문에 짐작해 보는 내용입니다. 붕당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공익을 위해 내세우는 정치 이념이 있지만, 중첩된 혼인 관계 등을 통해 이뤄진 세도 가문은 오로지 기득권의 확대·강화만을 꾀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지역 수령의 성격도 달라졌다고 글쓴이는 주장합니다. 지역 사족(士族)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울 중앙정치집단(경화거족 京華巨族)을 대신하는 향촌사회에 대한 일방적인 침탈자·수탈자였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들어 민란이 자주 일어난 까닭이 근본은 이런 지배세력의 성격 변화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일상이 된 민란

"홍경래의 난은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준비되었다. 1811년 10월에는 주요 참가자들이 모두 다복동에 모이면서 준비가 더욱 활발해졌다. 봉기군을 공개적이고 광범하게 모집했으므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1812년 4월 19일 홍경래는 전사하고 그의 목은 서울로 이송되었다. 정주성에서 포로가 된 수는 2983명이었는데 조선 왕조의 처분은 매우 잔혹했다. 10살이 넘는 남자 1917명을 4월 23일에 모두 참수하고 여자는 모두 노비로 삼았다."

"1862년에는 삼남을 휩쓴 민란이 일어났다." 임술민란이다. 2월 단성·덕산을 시작으로 경상도에서, 3월과 4월은 익산과 함평을 비롯해 전라도에서, 5월에는 충청도에서 민란이 집중 발생했습니다. "충청도는 서울의 관문으로 여겨졌으므로 조정의 위기의식이 더욱 높아졌다. 이후 봉기 주동자들은 예외 없이 효수되었으며 적극 가담자도 무겁게 처벌되었다." 이런 조선 왕조가 이명박 정부와 닮은 것 같지 않으신지요?

홍경래를 비롯해 민란을 일으킨 사람을 혹독하게 처벌한 조선왕조와, 촛불을 진압하고 조중동 불매운동을 벌인 이들을 처벌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세력을 거세차게 몰아치고 용산 참사를 일으키고 쌍용차 노조 탄압하고 비정규직 더욱 괴롭히는 이명박 정부가 무엇이 다를까요? 그래서 저는 여기 조선 왕조의 가혹한 처분을 보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이 책을 보고 배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관리를 죽이거나 성지를 약탈하지는 않고 오직 깃대를 세우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국왕의 회유가 있으면 곧바로 평정'되곤 했기 때문에, 고종 대에 이르면서는 정부도 민란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고 일반 민중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서글픈 역사입니다.

◇국제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조선
 
일본이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보내 조선을 위협한 운양호 사건이 왜 하필이면 1875년 9월 20일 일어났을까 궁금하지는 않으신지요? 답은 이렇습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한 사전 작업을 모두 마친 시점이 바로 1875년 9월 19일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앞서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주역들은 "일본 인구가 4000만 명을 넘어 생산력 수준에 많다고 보고 땅이 넓고 인구가 적은 만주와 몽골을 주목"했답니다. "그런 생활공간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의 점령이 필수였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이처럼 일본 국가 전략의 첫 단계였습니다.

일본은 1874년 타이완을 침공했다가 철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유구를 모호하게나마 일본 영토로 인정받았습니다. 일본은 이듬해 유구 국왕에게 청에 대한 조공 중지를 명령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이렇게 청을 주저앉힌 다음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1875년 5월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여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습니다. 대가로 조선 침투를 묵인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은 1875년 9월 19일 사할린 양도 의식을 치르고 이튿날 조선으로 운양호를 파견했습니다.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운명과 현실이 결정되는 세계사적 흐름과 아울러, 조선 왕조의 비자주성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역사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들어선 까닭 

독립문.


역사책을 읽으면서, 1896년 독립문을 세울 때 왜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를 잡았을
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나 사람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일본에 앞서 청나라가 조선을 식민지배를 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 3일째 되는 날 청군은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조선 국왕 고종은 청군 진영으로 옮겨졌습니다. 1885년 4월 톈진조약에서 청은 종속국(조선)의 내란에 자유로이 출병할 권한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10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기나긴 직함을 달고 조선에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내정에 마구 간섭하는 횡포를 저질렀습지요.

1886년 8월 제2차 한·러 밀약설 사건이 터지자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정부에 고종 폐위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고종이 러시아에 밀착한 것이 '종속국 의무의 범죄적 위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넘어서는, 근대적 식민지배 성격이 도드라졌다는 얘기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까지 10년은 청이 조선을 '감국監國'한 시기였고 위안스카이는 사실상 '조선 총독'이었다. 청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유럽이나 미국과 외교 사절을 교환하는 일도 방해하고 사전에 청의 인도를 받도록 요구했다. 경제 부문에서도 통제를 강화해 조선의 육상 전신선을 청이 관리하도록 했다."

고종은 1896년 황제라 일컫고 독자 연호를 썼습니다. 이에 맞춰 독립협회는 국민 모금으로 독립문을 짓는 '생쑈'를 벌였습니다. 국권은 이미 넘어가 있었습니다. 국권의 실체인 왕권은 왕조 보전만을 존립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조선 왕조는 백성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없고 백성이 왕조에 무엇을 해줄 것만을 요구했다."

한국 근대사를 아주 냉정하게 들여다 보는 책입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열패감'에 젖거나 '비분강개'에 충분히 빠질 수 있게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진실'을 잘만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이런 비아냥은 받지 않도록 애쓸 수는 있겠다 싶습니다.

영국의 정치가 조지 너대니얼 커즌이 내린 조선군에 대한 평가랍니다. "순수한 조선의 연대들은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스갯소리였다. 조선의 기마병은 어렵지 않게 유럽 2류 판토마임에서 단역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김훤주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 10점
이윤섭 지음/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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